Thursday, February 23, 2012

신라가 한반도(韓半島)에 있지 않았다는 이유. 제5부

● 열한번째: 신라와 말갈이 싸운 곳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제6대 지미이사금 14년(125) 봄 정월과 가을 7월에, 제7대 일성이사금 4년(137) 봄 2월과 6년(139) 8월에, 제10대 내해이사금 8년(203) 겨울 10월에, 제17대 내물이사금 40년(395) 가을 8월에, 제20대 자비마립간 11년(468) 봄에, 제21대 소지마립간 2년(480) 11월과 3년(481) 3월에, 약 356년 동안에 걸쳐 9차례 말갈(靺鞨)과 전쟁을 한 것으로 되어있다. 다음은
제7대 일성이사금 4년(137)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四年春二月 靺鞨入塞 燒長嶺五柵(사년춘이월 말갈입새 소장령오책) “ 4년 봄 2월에 말갈이 변방에 쳐들어와 장령에 있는 다섯개의 목책(木柵: 나무 말뚝을 박아 만든 울타리)를 불태웠다.” 여기에서 언급된 장령(長嶺)은 장령진(長嶺鎭)과 같은 장령(長嶺)으로 보이며, 시중에 나와있는 <삼국사기>에는 “장령진(長嶺鎭)은 경주 동쪽 25리에 있다.”라고 너무도 친절하게 해설을 해놓았는데, 경주 동쪽 25리가 당시 신라의 변방(邊方)이란 말과 같다. 그렇다면 신라(新羅)와 고구려(高句麗) 중간 지점인 경상북도나 강원도 부근에 말갈(靺鞨)이 살고있었다는 이야기가 성립되는 것이다. 원래 단군조선(壇君朝鮮)은 연방국(聯邦國)으로 단군조선 말기에 ‘조선족’에서 갈려나간 지파(支派)로 예(濊), 읍루(揖婁), 물길(勿吉), 말갈(靺鞨)로 부르다가 말갈에서 몽고족, 속말갈, 흑수말갈로 나누어 지며 흑수말갈에서 여진족(女眞族)으로 여진족에서 생여진(生女眞), 숙여진(熟女眞)이 생기고 생여진에서 만주족(滿州族)으로 이어지는 족속(族屬)을 말한다. 말갈(靺鞨)을 지금의 내외(內外) 몽고에 살고있던 몽고족 (蒙古族)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것으로 보인다. 식민사학이나 반도사학의 관점(觀點)에서 보면 한반도의 전라도와 충청도는 백제(百濟), 경상남북도는 신라(新羅), 그리고 백제와 신라 윗쪽은 고구려(高句麗)의 영토인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한반도에 있던 신라(新羅)가 말갈(靺鞨)과 356년 동안에 걸쳐 9번이나 전쟁을 했다는것은 이해가 되지않는 부분이다. 물론 식민반도사학 (植民半島史學)의 원조(元祖)이자 바이벌(Bible: 권위있는 서적)이라고 불리우는 <조선사> 37권 어디에도 한반도의 고구려, 백제, 신라 사이에 말갈(靺鞨)이 살고있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신라(新羅)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 열두번째: 당(唐)나라와 싸운 석성(石城)은?
“신라 제 30대 문무왕(文武王) 11년(671) 6월에 왕(문무왕)은 장군 죽지(竹旨) 등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백제 가림성(加林城)의 벼(식물: Oryza sativa)를 밟아버리게 했으며 마침내 당(唐)나라 군사와 석성(石城)에서 싸워 적군(당나라군) 5천 3백 명의 목을 베고 백제장군 2명과 당(唐)나라의 과의(果毅: 군사의 장교급 정도를 뜻한것으로 보임) 여섯명을 사로잡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이다. 당나라의 도성(都城)인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에서 백제땅 충청도 부여까지는 직선 거리 약 3,744리 이다. 한반도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식민반도사학 (植民半島史學)의 이론대로라면 한반도 경상도에 있던 신라와 싸우기 위해 당나라는 3,744리의 머나먼 길을 군사와 말을 배에 싣고 황해를 건너와서 전쟁을 했다는 이야기인데… 전설 같은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 전쟁에서 사대주의자(事大主義)들에게는 쉽게 이해가되지않을 당(唐)나라 군사 5천 3백명을 참수(斬首: 목을 벰)했다는 엄청난 기록이다. 당(唐)나라의 참패 (慘敗)인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석성(石城 )은 강서성(江西省)과 복건성(福建省) 사이에 있는 지명이다. 원래 백제(百濟)의 영토였으나 660년 나당(羅唐) 연합군에게 백제가 망한후 신라의 영토가 된곳으로 당(唐)나라는 신라를 배신(背信)하고 신라마저 정복(征服)하려고 백제의 부흥군(復興軍)을 도와 신라(新羅)에 도전(挑戰)하므로 발생한 전쟁으로 보인다. 신라는 한반도에 있지않았다.

● 열세번째: 복건성에는 아직도 신라의 흔적이
<삼국사기> ‘제21대 소지마립간’의 기록에, 秋七月 置臨海長領二鎭 以備倭賊 (추7월 치임해장령2진 이비왜적) “가을 7월에 임해와 장령에 2진을 설치해서 왜적(倭賊: 일본의 전신으로 당시 복건성의 맞은편인 대만에 있을 때임)에 대비 했다.” 당시 신라의 핵심 영토는 강소성, 안휘성, 호북성, 절강성, 복건성이다. 복건성(福建省)에는 신라구(新羅區)란 지명이 있었고, 2009년 현재의 복건성 자체
지도에도 신사(新祠), 신우(新圩), 신현(新縣), 신천(新泉), 라암(羅岩), 라원(羅源), 라교(羅橋), 라방(羅坊)등 신라의 신(新)자, 라(羅)자와 관련된 지명들이 많다. <태백일사> ‘고구려본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고구려 보장 12년(646)에 신라의 백성을 천주(泉州: 복건성에 있으며 왜倭가 있던 대만과 마주보는 곳으로 경도 118.525도 위도 25도에 위치함)에 옮기고 이로서 알맹이로 삼았다. 이 해(年)에 백제가 조공을 하지않아 병력을 파견하여 요서의 진평군을 취하고 백제군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복건성과 인접하는 절강성(浙江省) 임해(臨海: 김수로왕의 가락국이 있던 김해金海)에는 신라산(新羅山)이 있다고 <중국고지도>와 <대청일 통지>에 기록하고 있다. 신라가 망하고 1,070여년이
지난 지금도 지나대륙(支那大陸)에 신라와 관련된 지명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당시 이곳이 신라의 영토였음을 입증하는 것이며 신라(新羅)는 한반도(韓半島)에 있지 않았다는 증거다.

● 열네번째: 한반도의 현 지명들은 신라가 망한후 생긴 지명들이다.
<삼국사기> ‘잡지 제6 지리 4’에 의하면, “삼국시대(고구려, 백제, 신라)의 지명(地名)만 있고 위치는 자세히 알 수 없는 땅들” 358곳 중에 우리 한국사람들의 귀에 너무나도 익숙한 지명들로 해주(海洲), 강릉(江陵), 하동(河東), 부평(副平), 강남(江南), 해남(海南), 용산(龍山), 대구(大丘), 부산(釜山), 마포(馬浦)등의 지명이 기록되어 있다. 필자는 한국내의 지명들을 잘 알지못하기 때문에 더 많은 이름을 발췌하지 못하고 필자의 생각으로 한반도의 지명들이라고 믿어지는 지명들만 10개를 나열한 것이다. 만약 한반도 경상남북도에 신라가 있었다면 신라의 영토안에 있었던 대구와 부산(釜山)의 위치를 자세히 알 수 없다고 한다면,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기 그지없다. 삼국사기는 고려 17대 인종(仁宗) 23년(1145)에 김부식 어른이 쓴 것이다. 고려 인종은1141년에서 1165년 까지 24년간 황제 (皇帝)로 있었던 분이다. 신라가 935년에 망하고 210년 후에 <삼국사기>가 지어졌다. 신라가 망하고 약 1,070년이 지난 지금도 지나대륙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당시의 지명들이 혹은 지명들의 흔적이 있는데, 신라가 망한지 불과 210년 후에 당시 신라의 영토라고 믿고있는 한반도 경상남북도 안에있는 지명의 위치를 알 수 없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한마디로 신라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크게 웅변(雄辯)하는 것이 된다.

● 열다섯번째: 경주(慶州)는 경상북도에 있지도 않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56대 경순왕 9년(935)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11월에 왕은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서울을 떠나 태조(太祖: 고려 왕건)에게 귀순했다. 꽃다운 수레와 훌륭한 말이 30여리에 뻗쳐 길은 사람으로 메워졌으며 구경꾼들이 쭉 둘러서 있었다. 태조는 교외에 나가서 영접해 위로하고 대궐 동쪽에 가서 좋은 집 한구(區: 구역)를 주고 맏딸 낙랑공주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다. 12월에 왕(경순왕)을 봉하여 정승공(正承公)을 삼으니 그 지위는 태자의 위에 있었다. 봉록 1천석을 주고 시종한 관원과 장수들을 모두 채용해 주었으며 신라를 고쳐 경주(慶州)라 하여 공(公)의 식읍으로 삼았다.” 또한 <삼국사기> ‘잡지 제3 지리 1’에는, 末王金傅 以國歸我太祖 以其國爲慶州(말왕김부 이국귀아태조 이기국위경주) “마지막 왕 김부(경순왕의 이름)는 나라를 가지고 우리 태조(고려 왕건)에게 귀순하매 그 나라(신라)를 경주라 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 까지도 우리는 한반도 경주가 신라의 1,000년 동안의 도읍지(都邑地)로 배웠고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보는바와 같이 경주(慶州)는 신라가 망하고 난 후에 고려(高麗)를 세운 왕건(王建)이 만들어 준 이름인 것이다. 원(元)나라 때 탈탈이 지은 <요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開州 鎭國軍 節度 本貊地 高麗爲慶州 渤海爲東京龍原府 有宮展 都督慶 鹽 穆 賀四州事 (개주 진국군 절도 본맥지 고려위 경주 발해위동경용원부 유궁전 도독경 염 목 하사주사) “개주는 진국군이고 절도사를 두었다. 본래는 맥(고구려를 뜻함)의 땅이였으며 고려가 경주라 했다. 발해(대진)의 동경 용원부이며 궁전이 있다. 도독을 경주 염주 목주 하주 4곳에 두었다.” <요사>에서도 <삼국사기>처럼 고려가 경주라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발해(대진)의 동경 용원부라고 했다. 대조영이 세운 대진(大震: 발해)은 5경(다섯 곳의 수도)이 있었는데 동경 용원부가 바로 요녕성(遼寧省) 지금의 요양(遼陽)이였다. 2009년 대륙 지도에는 요양 동남쪽에 동경릉(東京陵)의 지명도 있다. 대진(大震)의 황제묘나 신라 경순왕의 묘인지 누가 알겠는가? 이렇게 경주는 요녕성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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