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February 23, 2012

신라가 한반도(韓半島)에 있지 않았다는 이유. 제5부

● 열한번째: 신라와 말갈이 싸운 곳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제6대 지미이사금 14년(125) 봄 정월과 가을 7월에, 제7대 일성이사금 4년(137) 봄 2월과 6년(139) 8월에, 제10대 내해이사금 8년(203) 겨울 10월에, 제17대 내물이사금 40년(395) 가을 8월에, 제20대 자비마립간 11년(468) 봄에, 제21대 소지마립간 2년(480) 11월과 3년(481) 3월에, 약 356년 동안에 걸쳐 9차례 말갈(靺鞨)과 전쟁을 한 것으로 되어있다. 다음은
제7대 일성이사금 4년(137)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四年春二月 靺鞨入塞 燒長嶺五柵(사년춘이월 말갈입새 소장령오책) “ 4년 봄 2월에 말갈이 변방에 쳐들어와 장령에 있는 다섯개의 목책(木柵: 나무 말뚝을 박아 만든 울타리)를 불태웠다.” 여기에서 언급된 장령(長嶺)은 장령진(長嶺鎭)과 같은 장령(長嶺)으로 보이며, 시중에 나와있는 <삼국사기>에는 “장령진(長嶺鎭)은 경주 동쪽 25리에 있다.”라고 너무도 친절하게 해설을 해놓았는데, 경주 동쪽 25리가 당시 신라의 변방(邊方)이란 말과 같다. 그렇다면 신라(新羅)와 고구려(高句麗) 중간 지점인 경상북도나 강원도 부근에 말갈(靺鞨)이 살고있었다는 이야기가 성립되는 것이다. 원래 단군조선(壇君朝鮮)은 연방국(聯邦國)으로 단군조선 말기에 ‘조선족’에서 갈려나간 지파(支派)로 예(濊), 읍루(揖婁), 물길(勿吉), 말갈(靺鞨)로 부르다가 말갈에서 몽고족, 속말갈, 흑수말갈로 나누어 지며 흑수말갈에서 여진족(女眞族)으로 여진족에서 생여진(生女眞), 숙여진(熟女眞)이 생기고 생여진에서 만주족(滿州族)으로 이어지는 족속(族屬)을 말한다. 말갈(靺鞨)을 지금의 내외(內外) 몽고에 살고있던 몽고족 (蒙古族)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것으로 보인다. 식민사학이나 반도사학의 관점(觀點)에서 보면 한반도의 전라도와 충청도는 백제(百濟), 경상남북도는 신라(新羅), 그리고 백제와 신라 윗쪽은 고구려(高句麗)의 영토인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한반도에 있던 신라(新羅)가 말갈(靺鞨)과 356년 동안에 걸쳐 9번이나 전쟁을 했다는것은 이해가 되지않는 부분이다. 물론 식민반도사학 (植民半島史學)의 원조(元祖)이자 바이벌(Bible: 권위있는 서적)이라고 불리우는 <조선사> 37권 어디에도 한반도의 고구려, 백제, 신라 사이에 말갈(靺鞨)이 살고있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신라(新羅)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 열두번째: 당(唐)나라와 싸운 석성(石城)은?
“신라 제 30대 문무왕(文武王) 11년(671) 6월에 왕(문무왕)은 장군 죽지(竹旨) 등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백제 가림성(加林城)의 벼(식물: Oryza sativa)를 밟아버리게 했으며 마침내 당(唐)나라 군사와 석성(石城)에서 싸워 적군(당나라군) 5천 3백 명의 목을 베고 백제장군 2명과 당(唐)나라의 과의(果毅: 군사의 장교급 정도를 뜻한것으로 보임) 여섯명을 사로잡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이다. 당나라의 도성(都城)인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에서 백제땅 충청도 부여까지는 직선 거리 약 3,744리 이다. 한반도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식민반도사학 (植民半島史學)의 이론대로라면 한반도 경상도에 있던 신라와 싸우기 위해 당나라는 3,744리의 머나먼 길을 군사와 말을 배에 싣고 황해를 건너와서 전쟁을 했다는 이야기인데… 전설 같은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 전쟁에서 사대주의자(事大主義)들에게는 쉽게 이해가되지않을 당(唐)나라 군사 5천 3백명을 참수(斬首: 목을 벰)했다는 엄청난 기록이다. 당(唐)나라의 참패 (慘敗)인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석성(石城 )은 강서성(江西省)과 복건성(福建省) 사이에 있는 지명이다. 원래 백제(百濟)의 영토였으나 660년 나당(羅唐) 연합군에게 백제가 망한후 신라의 영토가 된곳으로 당(唐)나라는 신라를 배신(背信)하고 신라마저 정복(征服)하려고 백제의 부흥군(復興軍)을 도와 신라(新羅)에 도전(挑戰)하므로 발생한 전쟁으로 보인다. 신라는 한반도에 있지않았다.

● 열세번째: 복건성에는 아직도 신라의 흔적이
<삼국사기> ‘제21대 소지마립간’의 기록에, 秋七月 置臨海長領二鎭 以備倭賊 (추7월 치임해장령2진 이비왜적) “가을 7월에 임해와 장령에 2진을 설치해서 왜적(倭賊: 일본의 전신으로 당시 복건성의 맞은편인 대만에 있을 때임)에 대비 했다.” 당시 신라의 핵심 영토는 강소성, 안휘성, 호북성, 절강성, 복건성이다. 복건성(福建省)에는 신라구(新羅區)란 지명이 있었고, 2009년 현재의 복건성 자체
지도에도 신사(新祠), 신우(新圩), 신현(新縣), 신천(新泉), 라암(羅岩), 라원(羅源), 라교(羅橋), 라방(羅坊)등 신라의 신(新)자, 라(羅)자와 관련된 지명들이 많다. <태백일사> ‘고구려본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고구려 보장 12년(646)에 신라의 백성을 천주(泉州: 복건성에 있으며 왜倭가 있던 대만과 마주보는 곳으로 경도 118.525도 위도 25도에 위치함)에 옮기고 이로서 알맹이로 삼았다. 이 해(年)에 백제가 조공을 하지않아 병력을 파견하여 요서의 진평군을 취하고 백제군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복건성과 인접하는 절강성(浙江省) 임해(臨海: 김수로왕의 가락국이 있던 김해金海)에는 신라산(新羅山)이 있다고 <중국고지도>와 <대청일 통지>에 기록하고 있다. 신라가 망하고 1,070여년이
지난 지금도 지나대륙(支那大陸)에 신라와 관련된 지명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당시 이곳이 신라의 영토였음을 입증하는 것이며 신라(新羅)는 한반도(韓半島)에 있지 않았다는 증거다.

● 열네번째: 한반도의 현 지명들은 신라가 망한후 생긴 지명들이다.
<삼국사기> ‘잡지 제6 지리 4’에 의하면, “삼국시대(고구려, 백제, 신라)의 지명(地名)만 있고 위치는 자세히 알 수 없는 땅들” 358곳 중에 우리 한국사람들의 귀에 너무나도 익숙한 지명들로 해주(海洲), 강릉(江陵), 하동(河東), 부평(副平), 강남(江南), 해남(海南), 용산(龍山), 대구(大丘), 부산(釜山), 마포(馬浦)등의 지명이 기록되어 있다. 필자는 한국내의 지명들을 잘 알지못하기 때문에 더 많은 이름을 발췌하지 못하고 필자의 생각으로 한반도의 지명들이라고 믿어지는 지명들만 10개를 나열한 것이다. 만약 한반도 경상남북도에 신라가 있었다면 신라의 영토안에 있었던 대구와 부산(釜山)의 위치를 자세히 알 수 없다고 한다면,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기 그지없다. 삼국사기는 고려 17대 인종(仁宗) 23년(1145)에 김부식 어른이 쓴 것이다. 고려 인종은1141년에서 1165년 까지 24년간 황제 (皇帝)로 있었던 분이다. 신라가 935년에 망하고 210년 후에 <삼국사기>가 지어졌다. 신라가 망하고 약 1,070년이 지난 지금도 지나대륙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당시의 지명들이 혹은 지명들의 흔적이 있는데, 신라가 망한지 불과 210년 후에 당시 신라의 영토라고 믿고있는 한반도 경상남북도 안에있는 지명의 위치를 알 수 없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한마디로 신라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크게 웅변(雄辯)하는 것이 된다.

● 열다섯번째: 경주(慶州)는 경상북도에 있지도 않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56대 경순왕 9년(935)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11월에 왕은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서울을 떠나 태조(太祖: 고려 왕건)에게 귀순했다. 꽃다운 수레와 훌륭한 말이 30여리에 뻗쳐 길은 사람으로 메워졌으며 구경꾼들이 쭉 둘러서 있었다. 태조는 교외에 나가서 영접해 위로하고 대궐 동쪽에 가서 좋은 집 한구(區: 구역)를 주고 맏딸 낙랑공주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다. 12월에 왕(경순왕)을 봉하여 정승공(正承公)을 삼으니 그 지위는 태자의 위에 있었다. 봉록 1천석을 주고 시종한 관원과 장수들을 모두 채용해 주었으며 신라를 고쳐 경주(慶州)라 하여 공(公)의 식읍으로 삼았다.” 또한 <삼국사기> ‘잡지 제3 지리 1’에는, 末王金傅 以國歸我太祖 以其國爲慶州(말왕김부 이국귀아태조 이기국위경주) “마지막 왕 김부(경순왕의 이름)는 나라를 가지고 우리 태조(고려 왕건)에게 귀순하매 그 나라(신라)를 경주라 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 까지도 우리는 한반도 경주가 신라의 1,000년 동안의 도읍지(都邑地)로 배웠고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보는바와 같이 경주(慶州)는 신라가 망하고 난 후에 고려(高麗)를 세운 왕건(王建)이 만들어 준 이름인 것이다. 원(元)나라 때 탈탈이 지은 <요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開州 鎭國軍 節度 本貊地 高麗爲慶州 渤海爲東京龍原府 有宮展 都督慶 鹽 穆 賀四州事 (개주 진국군 절도 본맥지 고려위 경주 발해위동경용원부 유궁전 도독경 염 목 하사주사) “개주는 진국군이고 절도사를 두었다. 본래는 맥(고구려를 뜻함)의 땅이였으며 고려가 경주라 했다. 발해(대진)의 동경 용원부이며 궁전이 있다. 도독을 경주 염주 목주 하주 4곳에 두었다.” <요사>에서도 <삼국사기>처럼 고려가 경주라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발해(대진)의 동경 용원부라고 했다. 대조영이 세운 대진(大震: 발해)은 5경(다섯 곳의 수도)이 있었는데 동경 용원부가 바로 요녕성(遼寧省) 지금의 요양(遼陽)이였다. 2009년 대륙 지도에는 요양 동남쪽에 동경릉(東京陵)의 지명도 있다. 대진(大震)의 황제묘나 신라 경순왕의 묘인지 누가 알겠는가? 이렇게 경주는 요녕성에 있었다.

신라가 한반도(韓半島)에 있지 않았다는 이유. 제4부

● 여섯째: 운주(運州)는 한반도가 아니다.
“신라 56대 경순왕 8년(934) 가을 9월에 운주(運州)지경(地境)의 30여 군(郡), 현(縣)이 태조(太祖: 고려 왕건)에게 항복했다.”라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운주(運州)는 현 산서성(山西城) 황하강(黃河江)이 꺾이는 지점에 있는 영제현(永濟縣) 동북으로 현 대륙지도상에 운성시(運城市)이다. 이 운성시(運城市) 서남 쪽이 바로 그 유명한 탁록(涿鹿: 산서성 서쪽 최남부 운성염지運城鹽池가 2009년 현재 해지解池로 이름이 바뀌고 그 일대인 당시의 탁록은 지금은 해주解州라 부름)으로 치우천황과 황제헌원이 10년간 싸운 곳이다. 시중에 나와있는 <삼국사기>에는 운주(運州)를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洪城)’이라고 친절하게 주해를 달아 놓았다. 말하자면 이곳 홍성 근처에서 치우(蚩尤)와 지나인 (支那人)들이 자신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헌원(軒轅)이 BC2707부터 BC2697까지 10년간 73회를 싸웠다는 말과 같다. 이웃집 닭이 웃을 일이다. 이것 또한 일본인들과 식민사학(植民史學)의 역사 날조(捏造)인 것이다. 신라는 한반도에 있지않았다.

● 일곱째: 임나(任那)는 절강성에 있다.
한반도 김해에 6개의 가락국(駕洛國)중 금관가락국이 제일 큰데 이 금관가락국이 있었던 곳인 임나(任那)에 야마토(大化) 일본이 궁가(宮家: 미야께)라는 통치기관 을 설치해 놓고 백제, 신라를 속국으로 만들었다는 “임나 일본부설”로 일본인들은 한반도 남쪽 가야국이 있었던 곳에 임나가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한반도(韓半島)남쪽에는 가야국(伽倻國)도 신라(新羅)도 없었다. 당시 김 수로왕의 가락국(駕洛國: 가야국伽耶國)은 절강성(浙江省)에 있었다. 임나는 무지절독 (武持節督)으로 ‘무사나 무인들이 뭉쳐서 이루어진 군사기지 같은것’이다. 임나(任那)는 지나대륙 (支那大陸) 절강성(浙江省) 임해(臨海: 김해金海)가 있는곳에 있었으며 백제(百濟)의 속국으로 백제가 망(亡)하면서 임나(任那)도 망한다. 이들의 주장은 거짓으로 임나는 한반도에 있지도 않았다.

● 여덟번째: 경주에는 왕들의 묘와 묘비가 없다.
한반도 경상도에 1,000년 사직(社稷: 나라)의 신라(新羅)가 있었다면 신라왕들의 묘(墓)가 모두 경상남북도에 있어야 한다. 다시말하면 한반도 경상남도 경주(慶州)에 1,000년동안 도읍지(都邑地)였던 왕궁터, 56명의 신라왕들의 묘(墓), 왕들의 묘비(墓碑)가 있어야 한다.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고낭포리에 신라(新羅)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의 릉(陵)이 있고 비각(碑閣)이 있다고 말할 분들도 있으리라 본다. 그러나 그 묘(墓)는 진짜묘가 아니고 비(碑)가있다면 그 비석 (碑石)은 이씨조선때 세운 비(碑)가 분명하다. 의심스러우면 Carbon-14 (탄소 년대 측정 법) 방법으로 한반도(韓半島)에있는 모든 묘지와 비석을 년대측정(年代測定)하면 간단히 풀리게 될 문제라 본다. 한반도 경상남도는 말할 것도 없고 한반도 (韓半島) 어느곳에도 신라왕의 묘지(墓地)가 있다고 기록된 사서(史書)는 없다. 천년 사직(社稷: 나라)인 한반도 경주에 왕궁터도, 황제(皇帝: 당나라 고종이 신라 29대 무열왕 김춘추를 ‘태종황제’ 라했다)들의 묘도, 묘비도 없다는 것은 무엇을 시사(示唆)하는가! 촌부(村婦: 시골 여자)가 죽어도 묘비를 쓰는데 하물며 천자국(天子國)인 대신라국(大新羅國) 왕들의 묘(墓)와 묘비(墓碑)가 없다니….. 신라는 한반도에 있지않았기 때문이다.

● 아홉번째: 계백장군이 싸운 황산(黃山)은 연산 벌판이 아니다.
<삼국사기> 제2권 백제6, 의자왕20년(660) 5월의기록을 보면, “ 당(唐)나라와 신라 군사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말을 듣고 왕(의자왕)은 계백(階伯) 장군을 보내어 결사대 5천명을 거느리고 황산(黃山)에 나아가 신라(新羅) 군사와 싸우게했다. 4번 싸워 4번 다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서 마침내 패전하여 계백이 전사했다. 이때 계백(階伯)장군이 마지막으로 싸운 황산(黃山)은 한반도 충청남도 연산 벌판이 아니고 지나(支那)대륙인 것이다. 안휘성(安徽省), 절강성 (浙江省) 강서성(江西省)이 서로만나는 곳에 황산(黃山)이 있고 당시 백제(百濟)의 사비성(泗沘城)은 황산 바로 윗쪽 현 대륙지도에 양자강(揚子江) 바로밑 청양(靑陽) 이라는 곳이다. 현 대륙지도(大陸地圖)에는 황산(黃山: 경도 118.276도 위도 29.926도의 위치)이라고 글자 한자 틀리지않고 그대로 남아있다. 신라는 대륙에 있었다.

● 열번째: 이하(泥河)와 당항성(黨項城)은 한반도에 없다.
“20대 자비마립간 11년 (AD468) 봄에 고구려와 말갈(靺鞨)이 북쪽 변경의 실직성(悉直城)을 습격했다. 가을 9월에 15세 이상된 하슬라(何瑟羅) 사람을 징발하여 성(城)을 이하(泥河)에 쌓았다.”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이하(泥河)는 하남성(河南省)과 안휘성(安徽省) 사이로 하남성에 있는 강(江)인데 이하(泥河)바로위에 항성(項城)이 있어 이 항성이 이때 쌓은 성(城)으로 보인다. 그 유명한 당항성(黨項城)이 바로 이 항성(項城)을 일컫는 것이다. 이 당항성은 신라가 당시 섬서성(陝西省) 서안 (西安)에 있는 당(唐) 나라로 들어가는 관문(關門)으로 27대 선덕왕 11년(642)에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의 연합군에게 이 당항성(黨項城)을빼앗김으로써 김 춘추가 이민족(異民族)인 당(唐)나라 고종 이치(李治)에게 “ 당(唐)나라로 들어오는 당항성을 고구려와 백제에게 빼앗겨 더 이상 당나라에 들어올 수 없으니 신라와 당이 연합하여 이들 백제와 고구려를 말망시키자는” 동이배달한민족(東夷倍達韓民族)의 민족상잔(民族相殘)의 비극의 불씨가 바로 이 이하(泥河)에 있던 당항성(黨項城) 때문으로 보여진다. 현 대륙지도 하남성(河南省)에 항성(項城)과 이하(泥河)가 글씨 하나 틀리지않고 그대로 남아있다.
한반도 어느곳에 이하(泥河)란 하천과 항성(項城)이란 지명이 있는지? 식민반도사학(植民半島史學)에게 정중히 묻는 바이다.

신라가 한반도(韓半島)에 있지않았다는 이유. 제3부

● 첫째: 신라의 금성(金城)을 포함한 모든 도읍지는 한반도에 없었다.
신라는 992년 동안 도읍지를 최소한 10번 이상 옮긴 것으로 보인다. 신라 최초의 도읍지인 금성(金城)은 감숙성(甘肅省) 난주(蘭州)이다. 이 곳이 바로 비단길(Silk road)을 연 곳으로 난주는 경도 103.545도와 위도 36.343도에 위치한 곳이다. 신라 김씨의 시조로 알려진 김일제(金日磾: 김알지의 중시조)는 흉노 조정(朝廷)에서 왕을 하던 휴도왕(休屠王)의 아들로 전한(前漢: BC202-AD8, 섬서성 서안)에서 벼슬을 하던 사람이다. 수,당나라 때 부르던 흉노족(匈奴族)은 당시 감숙성과 섬서성(陝西省) 북부에 살고 있어 흉노 조정, 김일제, 신라 금성은 서로 관련이 있어 보인다. 두번째의 금성은 산서성 현 임분시(臨汾市)로 한(漢)나라의 왕망(王莽: BC45-AD23)이 전한(前漢)을 멸하고 신(新)나라를 세울 무렵 감숙성 난주에 있던 신라는 난리를 피해 요동(遼東: 경도 110도의 황하 동쪽)인 산서성(山西省) 임분(臨汾)으로 옮겨 제2의 금성을 세운다. 임분은 단군조선을 세운 왕검 단군의 도읍지(都邑地)인 평양성(平壤城)이 있던 곳으로 이곳이 진한(辰韓: 진조선)에 속한 곳이다. 그후 신라는 영토를 넓혀 산서성 남부 패수현의 원곡 일대의 낙랑땅 까지 차지하였으나 고구려에 임분의 금성(金城)을 빼앗기고 2대 남해차차웅 20년(AD23)과 3대 유리 이사금 사이에 지나(支那)의 동쪽인 강소성(江蘇省) 서북 연수현으로 도읍을 옮기며 금성도 함께 옮긴 것으로 보인다. 그후 월성(月城)과 명활성 (明活城)에 도읍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문무왕 20년(680)에 가락국이 있던 김해(절강성 현 임해)를 소경(小京: 작은 서울)으로 삼았으며 그후 35대 경덕왕(景德王) 16년(757)에는 전주, 양주, 웅주, 한주, 삭주 5곳에 도읍지(都邑地) 를 두었다. 이들 도읍지는 모두 한반도가 아닌 지나대륙(支那大陸)에 있었다. 이런 주장은 <삼국사기>, <중국고금지명대사전>, <대당고김씨부인묘명>, <수서>, <구당서>, <신당서>, <북사>등에 근거한 것이다.

● 둘째: 낙랑(樂浪)은 산서성에 있다.
사서(史書)들의 기록에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의 활동 무대가
한반도가 아닌 지나 대륙인 것으로 <삼국사기: 김 부식>, <삼국유사: 김 견명>, <후한서: 범엽>, <구당서: 유후>, <신당서: 송기, 구양수>, <목천자전: 유효표>, <자치통감: 사마광>등에 기록되어 있다. 한가지 예로 <구당서>에, 新羅國 本弁韓苗裔也 其國在漢時 樂浪之也 東及南方 俱限大海 西接百濟 北隣高麗 東西千里 南北二千里 (신라국 본변한묘예야 기국재한시 낙랑지야 동급남방 구한대해 서접백제 북린고려 동서천리 남북이천리) “ 신라국은 본래 변한의 후예다. 그 나라는 한(漢)나라가 있을때 낙랑(樂浪: 하남성 낙양洛陽 북부를 포함하여 산서성 남,동부 패수浿水가 흐르는 패수현의 원곡일대) 땅에 있었다. 동쪽과 남쪽은 모두 큰 바다에서 끝나고 서쪽으로는 백제와 접하고 북으로는 고려(고구려)가있다. 동서로는 1천리이고 남북으로는 2천리 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반도(韓半島)는 동서가 672리 남북이 2,400리 정도이고, 우리가 배운대로 경상남북도가 신라(新羅)이고 전라남북도와 충청도가 백제(百濟)라면 경상도에서 전라도까지 동서(東西)가 어찌 1천리가 되며 경상북도 윗쪽은고구려(高句麗) 인데 남북(南北) 2천리란 말인가! 이런 엉터리를 민족사(民族史)라고 가르치고 배우고 있으니 가슴아픈 일이다. 신라는 한반도에 있지않았다.

● 세째: 신라 왕들의 묘는 대륙에 있다.
신라왕(新羅王)들의 묘(墓)가 대륙(大陸)에 있다. 1대 혁거세거서간 묘, 2대 남해차차웅 묘, 3대 유리이사금 묘, 5대 파사이사금 묘가 강소성(江蘇省) 사릉(원) (蛇陵園)에있고, 9대 벌휴이사금 묘가 강소성 연수현(連水縣)에있고 7대 선덕왕 묘, 31대 신문왕 묘가 강소성 낭산(狼山)에있고 34대 효성왕 묘가 강소성 법류사 (法流寺)에 35대 경덕왕 묘가 강소성 모지사(毛祗寺)에55대 경애왕 묘가 강소성 남산(南山)에있다. 25대 진지왕 묘는 사천성 영경사(永敬寺)에 29대 태종무열 왕 묘는 사천성 영경사 (永敬寺)에 38대 원성왕 묘는 사천성 봉덕사(奉德寺)에있다. 13대 미추이사금 묘가 하남성 임형현 대릉(大陵)에있고 41대 헌덕왕 묘는 산동성 천림(泉林)에 있으며 51대 진성여왕 묘는 안휘성 황산(黃山: 백제의 계백장군이 신라와 마지막 싸운곳) 에 있다. 49대 헌강왕 묘와 50대 정강왕 묘는 호북성 보제사(菩提寺)에 있다. 신라는 56명의 왕들중 18분의 묘(墓)가 지나대륙에 있는것으로 기록되어있다. 30대 문무왕 묘는 동해 큰바위 위이고 37대 선덕왕 묘는 동해에 화장했으니 모두 20분의 묘지가 밝혀진 셈이다. 상해(上海)가 있는 강소성(江蘇省)에 10분의 묘, 사천성(四川省)에 3분, 하남성(河南省)에 1분,
산동성(山東省)에 1분, 안휘성(安徽省)에 1분, 그리고 호북성(湖北省)에 2분의 묘가있다. 신라(新羅) 제 1대 혁거세거서간 (赫居世居西干)의 장지(葬地)에 관한 <삼국사기> 의 기록을보면, 在曇巖寺北 (재담암사북) “담암사 북쪽에있다.”라고 되어있다. 그런데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에는, 在曰雲岩寺南四里 (재왈운암사 남사리) “ 이르기를 운암사 남쪽 4리에있다.”로 <삼국사기>의 기록과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이 서로 다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재왈운암사남사리 (在曰雲岩寺南四里)”에서 ‘가로왈(曰) 자를 ‘구름운(雲) 자 위에 붙여서 ‘구름낄 담(曇)’자로 조작했고, ‘남사리(南四里)’를 ‘북(北)’으로 날조 (捏造)해 놓았다. 일본X들이 우리 역사서인 <삼국사기>를 조작, 날조한 또 하나의 실례인 것이다. 그들이 조작한 ‘담암사曇岩寺’는 어디에도 없고 강소성 상해근처에 있는 호구산(虎丘山)에 사릉(蛇陵)이 있고 그곳에 ‘운암사雲岩寺’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인들이 <삼국사기>는 조작을 했는데 <세종실록지리지>는 미처 변조하지 못한 탓인 것이다.

● 네째: 수두교 유행은 지나대륙이다.
단군조선(壇君朝鮮)때의 국교인 ‘수두교(일명 삼신오제교)’가 있다. 단군조선과 동시대(同時代)인 요(堯), 순(舜), 하(夏), 은(殷: 상), 주(周)나라 때까지 지나대륙(支那大陸)에 ‘수두교’의 일반 신앙이 널리 유행한다. 하(夏)나라를 세운 우(禹)가 홍수를 다스리기위해 8년동안 수고했으나 실패하여 남악형산(南嶽衡山: 호남성 형양시 남악구에 있는 산으로 해발 1,300.2m)에서 백마(白馬)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니 꿈에 현이(玄夷: 북쪽에 사는 동이로 산서성에 있던 단군조선을 뜻함)의 창수사자(蒼水使者: 왕검의 아들 부루)가 나타나 말하기를, 구산(九山: 구산은 없고 구산진이 산동성에 있음)의 동남쪽의 도산(塗山: 안휘성 숙주로 비정)에 신서(神書)가 있으니 석달동안 재계(齋戒: 마음과 몸을 깨끗이 하고 부정한 일을 멀리 하는 일)하고 신서를 꺼내보라 하여 우(禹)가 그대로 하고 금간옥첩 (金簡玉牒)의 신서를 얻어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을 배워 홍수를 다스리고 주신(州愼: 단군조선)의 덕을 고맙게 생각하여 정전(井田: 농지 개혁)를 제정하고 율도량형(律度量衡: 길이, 용적, 무게등의 단위 법)의 제도를 만들었다는 <오월춘추>의 기록으로 보아, 단군조선과 관련이 깊은 안휘성, 호남성과 인접한 지역인 강소성,호북성, 절강성에 ‘수두교’가 유행했으며 동황태일(東皇太一) 즉, 단군왕검께 제사(祭祀) 지내는 풍속이 가장 유행한 곳이 바로 호북성(湖北省), 절강성(浙江省), 강소성 (江蘇省)으로 단군조선의 유민(流民)들이 세운 신라(新羅)가 바로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 땅이라고 믿고있는 한반도 경상남북도에‘수두교’가 유행했다는 기록은 없다.


● 다섯째: 66번의 일식으로 본 신라의 강역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를 지은 서울대학교 박 창범 교수에 의하면, <삼국사기>에 기록된 신라(新羅)의 일식(日蝕)이 총 66개로 그중에서 53개가 사실로 입증 (立證)되어 80%의 실현률(實現率)을 보인다고 한다. 신라의 일식 기록은 서기 201년전과 서기 787년이후로 양분되는데 서기 201년 이전의 신라의 일식 최적 관측지는 양자강(揚子江) 유역이며 서기 787년 이후의 최적 관측지는 한반도 (韓半島) 남부라 한다. 신라(新羅)의 주된 강역(疆域)은 대륙의 강소성(江蘇省), 안휘성 (安徽省), 호북성(湖北省), 절강성(浙江省)으로 이곳이 바로 양자강(揚子江: 장강) 유역이며 당시 신라의 영토(領土)를 천문학 (天文學)이란 과학적인 방법으로 증명(證明)시킨 한 예(例)라 할 수 있다. 고구려의 영토였던 한반도는 고구려가 망한후 신라 35대 경덕왕 때부터 신라 영토의 일부가 된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한반도에 있지않았다.

신라(新羅)는 한반도(韓半島)에 있지않았다. 제2부

● 신라 최초의 도읍지(都邑地)인 금성(金城)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그 밖의 어떤 사서(史書)에도 신라가 언제 어느때 정확하게 도읍지(都邑地)를 옮겼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다만 당시의 여러가지 앞뒤 정황(情況)을 고려하여 유추(類推)가 가능 할 뿐이다. 신라(新羅)는 992년 동안 도읍지를 최소한 10번 이상 옮긴 것으로 보여진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 에 의하면, 금성(金城)은 감숙성(甘肅省) 난주(蘭州)에 있다. 감숙성 난주는 비단길(Silk Road) 을 연 곳으로 혁거세거서간 17년(BC41)에 왕이 6부(여섯 촌)를 순회하면서 농사짓기와 뽕나무 기르기를 권장하고 독려 (督勵) 했다는 기록이 있다. “시조 혁거세거서간 21년(BC37)에 서울에 성(城)을 쌓아 이름을 금성(金城)이라 했다.”라고 <삼국 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금성은 두번째의 금성으로 산서성 임분시(臨汾市)에 있는 금성을 뜻한 것으로 보여진다.
< 대당고 김씨부인 묘명>의 기록대로, “ 한(漢)나라에 난리가 나서 난을 피해 멀리 피난하였다. 우리 집안은 요동(遼東)에 숨어 살게 되었다.”라고 하는 요동(遼東)이 바로 산서성 (山西省)이기 때문이다. 제2대 남해차차웅 원년(AD4) 가을 7월과 11년(AD14)에 낙랑(樂浪: 하남성 낙양 북부를 포함하여 산서성 남,동부 패수가 흐르는 패수현의 원곡일대) 군사가 금성(金城)을 공격한 기록이 보이며, 20년 (AD23) 가을에 ‘금성(金星)이 태미성(太微星)자리에 들어갔다.’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당시 엄청난 사건(事件)이 일어난 것을 은유적(隱喩的)으로 기록한 것 같은데 필자는 아직 그 진의(眞義)를 알지못하겠다. 이때는 고구려와 신라가 함께 산서성(山西省)안에 이웃해 있을 당시로 신라(금성金星)가 고구려 (태미성太微星)에 흡수되었거나 고구려의 백성이 되었음을 암시한다. 그 근거로 신라(新羅)는 고구려(高句麗)와 AD245년까지 서로 전쟁(戰爭)을 한 기록이 보이지않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잡지 제3 지리1’의 기록에, “문무왕 20년(680)에 김해(金海: 김수로 왕의 가락국이 있던 절강성 현 임해)를 소경(小京: 작은 도읍지)으로 삼았다.” 그후 신라의 황금기를 이룬 35대 경덕왕 16년(757)에는 전주, 양주, 웅주, 한주, 삭주 5곳에 소경(小京: 작은 도읍지都邑地)를 두었다는 기록 등으로 보아 신라는 최소한 10곳 이상의 도읍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강소성(江蘇省)으로 도읍을 옮김
신라 11대 “조비이사금 16년 (AD245)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북쪽변경을 침입하므로 우로(于老)가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서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마두책 (馬頭柵)을 지켰다.”라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어 AD245년에 비로서 신라와 고구려 사이의 최초의 전쟁이 있었다. 그러나 신라는 4대 탈해이사금 8년(AD64)부터 백제(百濟)와 계속되는 영토전쟁을 한다. 이런 상황으로 보아 이때 신라(新羅)가 도성(都城)을 세번째로 대륙의 가장 동쪽에 있는 강소성(江蘇省)으로 옮긴 것으로 보아진다. 그 근거로 “3대 유리 이사금13년(AD36)가을 8월에 낙랑(樂浪)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을 공격 침략시켰다.”라고 되어있어 금성(金城)이 산서성(山西城) 임분시에 있었다면 낙랑(樂浪)의 북쪽 공격은 논리가 맞지 않기때문이다. 왜냐하면 신라의 북쪽은 고구려의 영토이기 때문이다. 또한 14년 (AD37)에 고구려가 낙랑을 쳐서 멸망(滅亡)시키니 낙랑 사람 5천명이 와서 신라에 의지했다. 이때 고구려의 도성은 계속 산서성(山西省)에 있을 때이다. 5대 파사이사금 22년(AD101) 봄 2월에 성(城)을 쌓아 월성(月城)이라 하고 가을 7월에 왕이 월성으로 옮겨가 거처했다. 월성(月城)은 현 강소성(江蘇省) 염성(鹽城)으로 신라의 4번째의 천도(遷都)가 된다. 9대 벌휴이사금 13년(AD196) 4월 궁궐의 남쪽에 있는 큰 나무에 벼락이 치고 금성(金城)의 동문에 벼락이 쳤다. 이 금성은 강소성 서북쪽 연수현(連水縣)의 금성(金城)으로 보이며 언제 쌓았는지는 알 길이없다. 그러나 감숙성 난주(蘭州)와 산서성 운성시(運城市)의 왕도(王都)를 동쪽 강소성 (江蘇省)으로 옮기면서 금성(金城)이란 이름도 함께 옮긴 것 으로 보인다. 도읍지(都邑地)를 옮길때는 도성(都城)의 이름도 함께 따라다니는 것을 고대사 (古代史)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 가야국의 침범
6대 지미이사금 4년(AD115) 봄 2월에 가야(伽倻)가 남쪽변경을 침범했다. 가을 7월에 왕이 친히 가야를 정벌했는데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황산하 (黃山河)를 건넜다. 황산하는 황산 (黃山)이있는 안휘성(安徽城)으로 김수로(金 首露) 왕의 가야국(伽耶國: 가락국, 금관가야국)이 있던 절강성(浙江城)과의 경계지역의 하천(河川) 이다. 당시 가락국의 도읍지는 절강성 낙청(樂淸)이란 곳이다. 낙청은 경도 121.017도 위도 28.162도의 위치이다. 신라와 가락국이 서로 인접하고 있었기에 가야가 신라의 남쪽 변경을 침입한 것이다. 이같은 정황으로 보아 신라는 산서성(山西省) 임분시의 금성(金城)에서 2대 남해차차웅 20년(AD23) 경에 강소성 (江蘇省)으로 수도(首都)을 옮긴 것이 분명해진다. 이밖에도 월성(月城)과 명활성(明活城) 의 기록이 보인다. 금성(金城)은 신라의 최초의 왕도 (王都)로 한반도(韓半島)에 금성(金城)이 있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금성(金城)이란 쇠붙이와 주물로 만든 성(城)이란 뜻으로 쇠금자(金)를 사용한 것만 보더라도 당시 신라인들이 얼마나 금속을 잘 다루었는가를 짐작케 한다.

● 신라의 국호(國號)와 다섯곳의 서울(小京)
신라는 개국(開國)초부터 신라(新羅)란 국호를 사용하지않았다. 처음에는 서나벌 (徐那伐)이라하고 계림(鷄林), 사라(斯羅), 사로(斯盧)등으로 부르다가 제 22대 지증마립간(지증왕) 4년( AD503) 겨울 10월에 비로서 신라(新羅)로 국호를 정하고 ‘신라국왕’이라는 존호(尊號)를 사용한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제4대 탈해이사금 9년( AD65) 봄 3월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에서 닭이 울어서 호공을 보내어 살펴보니 금빛 상자가 있어서 가지고와 열어보니 사내 아이가 있었다. 길렀는데 자라나서 총명하고 지략(知略 )이 많아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김(金)씨라 했으며 금성(金城)의 서쪽 시림을 고쳐서 계림 (鷄林)이라하고 국호(國號)를 계림이라고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제3대 유리이사금 9년(AD32) 봄에 6부의 이름을 개정하고 이에 이(李), 최(崔), 손(孫), 정(鄭), 배(裵), 설(薛)이라는 6가지 성(姓)을 내렸다. 제31대 신문왕(678-689) 5년(685) 다시 완산주를 설치하고 용원(龍元)을 총관(總管)으로 삼았다. 거열주 (居列州)를 승격시켜 청주(菁州)를 설치하니 비로서 9주(九州)가 갖추어졌다. 신문왕 때에 삼한(三韓) 즉,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이 통일(統一) 되었다는 기록이다. 제35대 경덕왕 16년(757) 겨울 12월에 사벌주를 고쳐서 상주(尙州: 요녕성), 삽량주를 고쳐서 양주(良州: 강소성), 청주를 고쳐서 강주(康州: 광동성), 한산주를 고쳐서 한주(漢州: 사천성), 수약주를 고쳐서 삭주(朔州: 산서성), 웅천주를 고쳐서 웅주(熊州: 호북성), 하서주를 고쳐서 명주(溟州: 신강성), 완산주를 고쳐서 전주(全州: 하북성), 무진주를 고쳐서 무주(武州: 감숙성)라 하고, 전주(全州), 양주(良州), 웅주(熊州), 한주(漢州), 삭주(朔州) 5곳에 수도(首都: 서울) 를 두었다. 청(淸)나라 건륭 42년(1777)에 한림원에서 발행한 <만주원류고>에 의하면, ‘구당서’와 ‘신당서’를 인용하면서 “계림(鷄林)은 현재(1777년 당시의 청나라)의 길림(吉林: 길림성의 길림으로 경도 126.735도 위도 43.897도의 위치)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당시 신라의 9주(九州)의 강역이 간도땅까지 포함된 것으로 되어 있다. 신라의 9주를 다시 요약하면, 당(唐)나라가 있던 섬서성 서안(西安)과 하남성 서부 일부를 제외한 지나(支那) 전대륙(全大陸)이 신라의 영토가 된 것 이다.

신라(新羅)는 한반도(韓半島)에 있지않았다. 제1부

역사(歷史)의 3대 요소(要素)를 사람, 장소, 시간이라 한다. 우리 동이배달 한민족(東夷倍達韓民族) 처럼 지나(支那) 대륙의 광활한 영토(領土)를 빼앗기고 한반도(韓半島)로 쫒겨온 민족사(民族史)의 경우에는 그 당시의 영토, 즉 강역 (疆域: 국경)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정확하게 밝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금으로부터 약 4,300년 전의 단군조선(壇君朝鮮)때 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 대진국(발해), 고려때까지 사서(史書)에 자주 나타난 지명들인 영주(營州)를 경상 북도 영주군이라하고 패수(浿水)는 대동강의 옛 이름이며 살수(薩水)는 청천강, 평양성(平壤城)은 한반도 평안남도 평양이라하는등 망발(妄發)을 서슴치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고증 (考證)이나 연구(硏究) 없이 일제하에서 배운 엉터리 역사(歷史)를 앵무새 처럼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 신라 시조(始祖)는 김씨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 시조 혁거세 거서간’의 기록에, “돌산고허촌장 (突山高墟村長) 소벌공(蘇伐公)이 양산(楊山) 기슭 나정(蘿井: 우물) 옆에 있는 숲사이에 말(馬)이 무릎을 꿇고 울고있어 가보니 갑자기 말은 볼 수 없고 다만 커다란 알(卵) 하나만 있었다. 그것을 깨어보니 갓난아이가 나왔다. 데려다 길렀는데 여남은 살이되자 기골이 준수하고 숙성하였다. 6부 사람들은 그 출생이 신기하고 이상했으므로 그를 높이 받들고 존경했다. 이때 그를 세워서 임금으로 삼았다. 진한(辰韓) 사람들은 표주박을 박(朴)이라 했는데 처음에 큰알이 표주박과 같았으므로 박으로 성을 삼았다. 거서간(居西干)은 진한에서는 임금을 말한다. 혹은 귀한 사람을 부르는 칭호라고도 한다.”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쓴 김 부식도, “신라의 박씨, 석씨는 모두 알에서 나왔고 김씨는 황금 궤(상자) 속에 들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며, 혹은 황금수레를 타고 왔다고 하니 이는 너무 기괴 (奇怪)하여 믿을 수 없으나 세속이 서로 전하여 사실이라 한다.”라고 논평하여 김 부식(金富軾) 자신도 신라(新羅) 시조 혁거세에 ‘박(朴)’씨를 하사 (?) 하여 박혁거세(朴赫居世)로 만들었지만 그의 난생신화 (卵生神話: 알에서 태어났다는 신화)에 의구심을 가졌다.
2008년 KBS 역사 스페셜(Special)에서 흉노 휴도왕(休屠王)의 태자(太子) 김일제(金日磾: BC 134-BC86)가 신라 김씨의 조상이라 소개하면서 근거로 신라 30대 ‘문무대왕릉비’와 1954년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에서 발굴된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을 소개했다. <대당고김씨부인묘명>의 기록에, “ 태상천자(太上天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하고 집안을 열어 드러내셨 으니 이름하여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로 이분이 곧 우리가 받은 성씨(姓氏)인 김씨의 시조(始祖)이다. 먼 조상의 이름은 김 일제이시고 흉노 조정(朝廷)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西漢)에 투항하여 무제(武帝)아래서 벼슬 하였으며 그후 7대에 걸쳐 벼슬하였다. 한(漢)나라에 난리가 나서 난을 피해 멀리 피난 하였다. 우리 집안은 요동(遼東)에 숨어 살게되었다.”라고 되어있다. 또한 문무왕(文武王)비문에는 문무왕의 조상은 “투후로 7대를 이어 하늘에 제사지내고… 15대조인 성한왕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신라김씨 (新羅金氏)의 시조(始祖)는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BC 2578-BC 2494)이고 중시조(中始祖: 쇠퇴한 가문을 중흥시킨 조상)는 김 일제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신라 시조(始祖)의 왕호(王號)가 거서간(居西干)인데 거서간(居西干)의 뜻은 “서쪽에서 살다온 왕”으로 서쪽에 있던 한(漢)나라에서 난을 피해 요동(遼東)으로 왔다는 본문의 기록과 일치한다. 따라서 신라의 시조(始祖)는 ‘박’씨가 아니라 ‘김’씨로 보아야 한다.

● 왕망(王莽)은 김 일제의 증손자?
“한(漢)나라에 난리(亂離)가 나서 난을 피해 요동(遼東)에 숨어 살게되었다.” 라고한 한(漢)나라 난리는 왕망(王莽)이 세운 신(新: AD8-AD23) 나라가 망(亡)하고 유수(劉秀: 광무제)가 후한(後漢)을 세우는 과정에서 일어난 난리를 뜻한 것으로 보여진다. 왕망(王莽: BC45-AD23)이 전한(前漢: BC202-AD8)을 멸망시키고 신(新)이란 나라를 세워 15년간 대륙을 지배하지만 지나(支那) 정사(正史)인 25사에 들지도 못할 뿐더러 ‘왕망 열전’ 정도로 사서에 기록되어 황제(皇帝)다운 대우를 받지못하고 있다. 15년이란 짧은 기간중 왕망은 많은 개혁정책을 폈는데 특히 그는 수 많은 지명(地名)들을 개칭(改稱)한 사람이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반고(班固)가 쓴 <한서漢書> ‘곽광 김 일제전’의 기록이다. “ 當母南卽莽母功顯君同産弟也(당모남즉망모공현군동산제야) 당(김당)의 어머니 는 남(남대부인)인데 곧 망(왕망)의 어머니이고 공이 현저한 자로 친동생 이다.” 라고 되어있어 김 일제(金日磾)의 증손자인 김당(金當)의 어머니가 왕망(王莽)의 어머니로 김당과 왕망이 형제지간으로 되어있다. 말하자면 왕망은 김 일제의 증손자로 왕(王)씨가 아니고 김(金)씨란 말이 되는 것이다. 왕망이 신도후 (新都侯) 에 봉해졌기 때문에 신도후의 신(新)자를 따서 신(新)나라를 세웠다고 해석 할 수도 있지만 1,000년 사직(社稷)의 신라(新羅)가 왜 서나벌, 사라, 사로, 계림등의 국호를 버리고 신(新)자를 택하여 신라(新羅)라고 했는지 우리 후손들이 알지못한 비밀이 숨겨져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 요동(遼東)은 황하 동쪽
원래 요동(遼東) 요서(遼西)는 경도(동경) 110도를 기준하여 서쪽을 요서라하고 동쪽을 요동이라 했다. 섬서성(陝西省)과 산서성(山西省)의 경계를 이루고있는 현재의 황하강(黃河江: 당시 요수遼水)을 기준하여 요동과 요서로 불렀다. 반고(班固)가 쓴 <한서漢書> ‘지리지’에, 요동군(遼東郡)은 유주(幽州)에 속한 지역으로 양평(壤平), 신창(新昌), 무려(無慮), 망평(望平), 요양(遼陽), 험독(險瀆), 거취(居就), 안시(安市), 무차(武次), 서안평(西安平)등이라 되어있다. 이곳이 바로 단군왕검(壇君王儉)과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이 있던 현 산서성을 말한다. 산서성은 동이배달한민족 (東夷倍達韓民族)의 중원(中原: 역사 문화의 발원지) 으로 단군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대진(발해), 고려의 핵심 영토였다. 본문에서 “한(漢)나라에 난리가 나서 난을 피해 요동 (遼東)에 숨어살았다.”는 요동이 바로 산서성 임분시(臨汾市)를 뜻하는 것이다. 한(漢) 나라의 도성(都城)인 서안(西安) 에서 산서성으로 몸을 피신한 것이다. 평양성(平壤城)을 지나 남쪽으로 흘러 내려가는 강(江)을 고구려때는 압록수(鴨綠水)라고 불렀고 다른 이름으로는 마자수, 당취수, 대요수, 그리고 고려(高麗)때는 안민강(安民江)이라고도 불렀으며 현재는 분수(汾水) 혹은 분하(汾河)라고 부르고있다. 당(唐)나라가 요동을 정벌한다는 “요동遼東”은 당시 산서성(山西省)에 있던 평양성 (平壤城)에 도읍(都邑)한 고구려(高句麗)를 뜻한 것이다.

● 단군조선 유민(流民)들이 세운 신라
<삼국사기> ‘신라 본기 제1, 혁거세 거서간(赫居世居西干)’편을 보면, “ 전한(前漢) 효선제(孝宣帝) 오봉원년 (BC 57) 갑자 4월 병진에 왕위에 오르니 왕호(王號)는 거서간(居西干: 서쪽에서 살다온 왕이란뜻)이였다. 그때 나이는 13세였다. 국호를 서나벌 (徐那伐) 이라 했다.” 이보다 앞서 조선(朝鮮: 단군 조선)의 유민(流民)들이 여러 산골짜기에 흩어져 살면서 여섯마을을 이루고 있었는데 첫째 알천 양산촌, 둘째 돌산 고허촌, 셋째 취산 진지촌, 넷째 무산 대수촌, 다섯째 금산 가리촌, 여섯째 명활산 고야촌으로 이 여섯 마을은 경도 110도 (산서성과 섬서성의 경계인 황하로 당시의 요수遼水)를 경계로하여 산서성 서쪽인 섬서성(陝西省), 감숙성(甘肅省), 청해성(靑海省), 사천성(四川省), 신강성(新疆省) 동쪽 일부로 비정(批正)한다.
그 근거로 <산해경>을 인용하면,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 天毒 其人水居偎人愛之(동해지내 북해지우 유국명왈조선 천독 기인수거 외인애지) “동해(산동성과 하남성 경계에 있던 천연호수로 당시에는 동해, 발해, 거야택, 대야택임)안의 북해( 산서성 서남 최남단에 있는 운성염지로 당시에는 북해 또는 창해라고 부른 곳이며 2009년 현지 이름으로는 해지解池임) 모퉁이에 나라가 있는데 이름하여 조선이다. 조선(朝鮮)을 천독(天毒)이라하며 그 사람들은 물이있는 곳에서 살고 사람을 가까이하고 사랑한다.” 여기서 ‘북해 모퉁이’라고 한것은 이곳 산서성이 단군조선(壇君朝鮮)의 영토이자 왕검단군(王儉壇君)의 왕검성( 고구려때의 요동성인 현 산서성 단곡)이 북해(北海)와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천독(天毒: 하늘의 독을 가지고있는 무서운 사람)은 천축국 (天竺國)이며 도덕(道德)을 귀중하게 생각하고, 문서(文書: 많은 역사와 글)를 가지고있으며 금,은(金,銀)과 돈을 가지고 나라 가운데서(단군조선에서) 죽음을 무릎쓰고 떠나갔다”라고 <산해경>을 쓴 곽박(郭璞)이 주해(註解)를 한것이다. 천축국 (天竺國)은 동,서,남,북, 중앙으로 5천축국이 있었는데 중천축국에서 석가모니가 출생한 것으로 되어있다. 단군조선(壇君朝鮮)의 진한(辰韓: 진조선)이 BC200 년경에 흉노족 모돈(冒頓)에게 망하고 변한(弁韓: 번조선)이 위만에게 BC 194 년경에 망하자 많은 단군조선의 유민(流民)들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피난을 가서 신강성(新疆省), 청해성(靑海省), 감숙성(甘肅省), 서장성(西藏省)일대에
5천축국을 세우게된다. 따라서 최초의 신라가 건국될 때 여섯 마을이라고 한 지명 위치는 모두 지나(支那) 대륙의 서쪽 지방 즉, 경도 110도로 갈리는 황하강(黃河江)
서쪽 이여야 한다.

Tuesday, February 14, 2012

한사군(漢四郡)은 있지도 않았다.

● 한사군의 유래
단군조선(壇君朝鮮)은 국초(國初)부터 진한(眞韓: 진조선), 마한(馬韓: 막조선), 변한(弁韓: 번조선), 즉 3한(韓)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진한은 단군(壇君)이 직접 통치하고 단군을 보좌하는 왕으로 변한과 마한을 두었다. 단군조선 변한(弁韓)을 연(燕)나라 도적(盜賊) 위만(衛滿)이 술수(術數)로 빼앗아 조선(朝鮮)이란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여 ‘위만조선衛滿朝鮮’이라 알려진 나라를 한(漢)나라 무제(武帝: 유철)가 위만의 손자 우거(右渠)를 멸하고 그곳 옛 번조선(변한)땅에 낙랑(樂浪), 진번(眞番), 임둔(臨屯), 현도(玄菟)를 설치했다는 설(說)이 바로 한사군 (漢四郡)이다. 사서(史書)에 등장하는 연(燕)나라는 11개로 여기서의 연(燕: BC202-BC195)은 한(漢) 나라 유방(劉邦)이 개국(開國) 공신(功臣)이던 자신의 친구 노관(盧綰)을 제후(諸侯)로 책봉한 나라를 말한다. 이 연(燕)은 주(周)나라 무왕이 자신의 동생 소공석(召公奭)을 연의 제후로 봉(封)한 그 연(燕)을 계승한 것으로 연의 도읍(都邑)은 하남성(河南省)정주(鄭州)이다.

● 조선과 연나라의 전쟁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BC770-BC233)는 단군조선 35대 사벌(沙伐) 단군 부터 47대 고열가(高列加) 단군 시기로 단군조선은 연(燕), 제(劑), 조(趙)와 끊임없는 전쟁으로 일관한다. <한단고기◦단군세기>의 기록을 보면,“35대 사벌단군 갑술 66년(BC707) 단제(壇帝)께서 조을(租乙)을 파견하여
똑바로 연나라 도성(하남성 정주)을 돌파하고 제(齊)나라 군사와 임치(臨淄)의 남쪽 교외에서 싸워 승리하였음을 알려왔다.” “36대 매륵(買勒)단군 무진 52년(BC653) 단제께서 병력을 보내 수유(須臾: 변한을 칭함)의 군대와 함께 연(燕) 나라를 정벌하였다. 이에 연나라 사람이 제나라에 위급을 알리자 제나라 사람들이 크게 일어나 고죽(孤竹: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 산서성 서남부 황하강이 꺽기는 지점으로 현, 영제시(永齊市) 일대)에 처들어왔는데 우리의 복병에 걸려서 싸워 보았지만 이기지 못하고 화해를 구하고 물러갔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변한(弁韓) 제68대 왕(王) 수한씨(水韓氏)때 연(燕)과의 전쟁에서 연나라가 패하여 변한은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를 인질(人質)로 잡았다. <위략>도 우리와 같은 기록을 하고있다.“燕有賢將秦開爲質於朝鮮(연유현장진개위질어조선) 연나라 장수 진개가 조선에 인질로 잡혀있었다.”이 사건에 대한 <사기> ’흉노전’은 약간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燕公子爲質於番韓(연공자위질어번한) 연나라 공자(?)가 번한에 인질로 잡혀있었다.” 진개라고 이름을 밝히지 않고‘공자’라고 인질의 이름을 감춘 것이다. 그 이유는 진개가 연(燕)나라 소왕(BC312-BC279) 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조선에 28년간 인질(人質)로 있던 진개(秦開)가 변한을 탈출한 후 변한(弁韓)에 처들어와 조선(朝鮮)의 서쪽변두리 천리땅을 빼앗았다. 이때부터 단군조선은 국력이 기울기 시작한다.

● 위만에게 빼앗긴 변한(弁韓: 번조선) 땅
진시황이 BC221년에 전국시대(戰國時代)를 통일하고 15년 만인 BC206년에 전국각지에서 일어난 농민 반란(反亂)에 의해 망한다. 진승, 오광, 항우, 유방등의 농민 반란에서 유방(劉邦)이 승리하여 한(漢)나라를 세우게된다. 한(漢)의 제후가 된 노관(盧綰)이 유방을 배반하고 흉노(匈奴)로 도망하자 노관의
부하인 위만(衛滿)은1천여명을 데리고 변한 왕 기준(箕準:BC243-BC194)에게 망명하니 준(準) 왕은 위만을 박사(博士)로 삼아 변한의 서쪽 땅 상하운장(上下雲障)을 맡겨 다스리게 했다. 위만은 차츰 다른 나라에서 온 망명자들로 세력을 규합하여 위만이 번조선(番朝鮮)에 망명온지 3년만에 준(準)왕에게
반기를 들고 왕위를 빼앗는다. 이부분을 사마천의 <사기>는 다음과같이 기록하고있다. “ 燕王盧綰反 入匈奴 滿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障 (연왕노관반 입흉노 만망명 취당천여인 추결만이복이동주출새 도패수 거진고공지상하장) 연왕 노관이 반란을하여 흉노로 들어가고 만(위만)은 천여 명의 무리를 모아 망명하였다. 머리를 뒤로틀어 땋은 몽치머리와 만이(오랑캐) 복장을 하고 동쪽 요새를 탈출해 패수를 건너 진(秦)나라의 옛 빈땅 상하장에서 살았다.” 망명(亡命)이란 혁명 또는 그밖의 이유로 자기 나라에 살지못하고 남의 나라로 몸을 피하는 것을 말한다. 위만(衛滿)이 망명(亡命)은 했는데 망명한 나라가 없다. 사마천(司馬遷)은 위만이 단군조선(檀君朝鮮) 변한(弁韓)으로 망명했다고 기록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소위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 한다. 과연 사마천 다운 발상이라 하겠다.

● 패수(浿水)가 청천강 ?
위만이 건넜다는 패수(浿水)는 우리가 알고있는 청천강이 아니다. 패수를 설명하기위해서 <수경주>를 인용하겠다. 지나(支那)대륙의 하천(河川) 약 120개를 자세히 설명해놓은 고대(古代) 지리서로 <수경주水經註>가 있다. <수경주> ‘13주지’에 의하면, 浿水縣在樂浪東北 鏤方縣在郡東 蓋出其縣南逕鏤方也 昔燕人衛滿 自浿水西至朝鮮(패수현재낙랑동북 루방현재군동 개추기현남경루방야 석연인위만 자패수서지조선)“패수현은 낙랑의 동북에있고, 루방현은 낙랑군의 동쪽에있다. 패수가 그 남쪽에서 나와
루방을 지난다. 옛 연나라 사람 위만이 패수 서쪽에있는 조선까지 갔다.”戰國時 滿乃王之 都王險城 地方數千裏 其地今高句麗之國治(전국시 만내왕지 도왕험성 지방수천리 기지금고구려지국치) “전국시대에 위만이 왕으로 왕험성(단군왕검의 왕검성)에 도읍했으며 땅이 수천리였다. 그 땅은 지금 고구려가 다스리는 땅이다.” 이상은 <수경주>에서 간추린 내용이다. <한서지리지> ‘낙랑군樂浪郡’의 기록을 보면, 한(漢) 무제때 설치한 것으로 유주(幽州)에 속한다고 되어있다. 낙랑군에 속하는 지명들로 조선(朝鮮), 패수(浿水), 대방(帶方), 장령, 돈유, 루방(鏤方), 해명(海冥), 소명(昭明)등이 있다.
그밖에 유주에 속하는 군(郡)으로 대군(代郡), 상곡군(上谷郡), 어양군(漁陽郡), 우북평(右北平郡), 요서군(遼西郡),요동군(遼東郡), 현도군(玄菟郡)이있다. 또다른 사서로 <금사> ‘지리지’을 인용하면, “有太行陘 太行山 黃河 沁水 浿水(유태행형 태행산 황하 심수 패수) 태행단층이 있고 태행산, 황하, 심수, 패수(浿水)가있다.” “鎭四 武德 柏鄕 萬善 淸化(진사무덕 백향 만선 청화) 진사 무덕, 백향, 만선, 청화등 4진을 두었다.” “修武有濁鹿城(수무유탁록성) 수무현(황하북부 하남성)에 탁록성(濁鹿城)이 있다.”興定四年以修武縣重泉村爲山陽縣 隷輝州(흥정사년이수무현중천촌위산양현 례휘주)“흥정 4년에 수무현 중천촌을 산양현으로 바꿔 휘주에 속하게했다.” 武陟有太行山 天門山 黃河 沁水 鎭一宋郭(무척유태행산 천문산 황하 심수 진일송곽) “무척현에 태행산(太行山)이 있고 천문산, 황하, 심수(沁水), 송곽진이 있다.” <수경주>, <한서지리지>, <금사 ◦ 지리지>에서 언급된 이름들은 모두 산서성(山西省) 남부와 황하(黃河) 북부 하남성(河南省)에 있는 지명(地名)들이다.
따라서 패수(浿水)는 황하북부 하남성에 있는 강(江)으로 제수(濟水), 취수(溴水)라고도 했고 고려때는 패강(浿江)이라고 했으며 현, 지나대륙지도에는 망하(蟒河) 라고 되어있는 하천(河川)인 것이다. 패수(浿水)는 우리 동이배달한민족사(東夷倍達 韓民族史)의 강역을 찿는데 가장 중요한 지명인 것이다.

● 자중지난으로 망한 위만조선
연(燕)나라 도적 위만(衛滿) 이 번조선(변한)을 BC194년에 강탈(强奪)하여 그의 손자 우거(右渠)때인 BC108년에 한(漢)무제에 망함으로 위만조선은 86간 지속 되었던 나라다. 약 1년간 한무제(漢武帝)의 육군 5만, 수군 7천과 싸운 우거(右渠)와의 전쟁은 무제의 완전한 패전(敗戰)이였다. 자중지난(自中之亂), 우거 정권 내부의 분열로 우거의 신하들이 우거를 살해하고 한(漢)나라에 항복했기 때문에
전쟁이 쉽게 끝날 수 있었다. 수륙 총사령관인 한(漢)나라 순체(荀彘 )가 계속 공격하자 우거 진영에서는 결사항전파(決死抗戰派) 와 주화파(主和派)로 갈린다. 우거(右渠)의 아들을 포함한 많은 신하들은 주화파였고 우거와 성이(成已) 장군등은 결사항전을 주장한다. 지금의 장관급 벼슬에 있던 로인(路人), 한음(韓陰), 니계상 (尼谿相) 삼(參), 장군 왕겹(王唊)등이 모두 도망해 한(漢)나라에 항복하고,
삼(參) 은 자객을 보내 우거(右渠)를 살해한다. 왕이 살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이(成已) 장군은 도성인 왕검성(王儉城)을 끝까지 지킨다. 또 다른 내부 반역자인 우거의 아들 장강(長降)과 최(最)의 간계(奸計)로 성이 장군이 죽어 결국 전쟁은 끝이난다. <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 左將軍使右渠子長降 相路人之子最告諭其民 誅成己 以故遂定朝鮮 爲四郡 封參爲澅淸侯 陰爲荻苴侯 唊爲平州侯 長降爲幾侯
最以父死頗有功 爲溫陽侯 (좌장군사우거자장강 상로인지자최고투기민 주성기 이고수정조선 위사군 봉삼위홰청후 음위적저후 겹위평저후 장강위기후 최이부 사파유공 위온양후) 좌장군이 우거의 아들 장강을 시키고 상로인의 아들 최가 사람들을 꾀어 성기를 죽였다. 이로써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여 사군으로 했다. 삼을 봉하여 홰청후로 삼고, 음을 적저후로, 겹을 평주후로, 장강을 기후로삼는다. 최는 아비의 죽음에 공이 큼으로 온양후로 삼는다.” 사마천의 <사기>에 4군(郡)이라 했지만 사실은 5군이며, 그 5군(郡)에 봉(封)해진 제후(諸侯)들은 한(漢) 나라 사람들이 아니고 모두 반역(反逆)에 가담한 위만조선 우거(右渠)의 신하들 이다. 여기 <사기>에 기록된바와 같이 한무제(漢武帝)가 위만조선(衛滿朝鮮)를
멸(滅) 하고 번조선(변한)땅에 사군(四郡)을 두었다고 했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있는 한사군(漢四郡)인 낙랑, 진번, 임둔, 현도를 설치한 것이 아니다. 한오군(漢五郡)으로 다섯 제후(諸侯)를 임명한 것이다.그러나 먼 훗날 반고(班固)가 쓴 <한서漢書> ‘서남이 양월 조선전’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故遂定朝鮮爲眞番, 臨屯, 樂浪, 玄菟四郡 (고수정 조선위진번, 임둔, 낙랑, 현도사군) 마침내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 임둔, 낙랑, 현도 사군을 두었다.”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에 없던 낙랑(樂浪), 진번(眞番), 임둔(臨屯), 현도(玄菟)가 약 180년이 지난후 반고에 의해서 한사군(漢四郡)이 조작(造作)된 것이다. 이후부터 다른 사서(史書)들도 한결같이 한 무제(武帝)가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멸하고 그곳에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한 것으로 각색(脚色)되어 왔다. 특히 일제와 식민사학자들은 위만(衛滿)이 지나(支那) 사람으로 우리가 지나의 지배를 받았다고 가르쳤다. 한사군(漢四郡)은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다.

Sunday, February 12, 2012

단군조선(壇君朝鮮) 연대표

제1대 단군환검(壇君桓儉)(단군왕검) BC 2333 (93년간)
제2대 부루(扶婁)단군 BC 2240 (58)
제3대 가륵(嘉勒)단군 BC 2181 (45)
제 4대 오사구(烏斯丘)단군 BC 2137 (38)
제5대 구을(丘乙)단군 BC 2099 (16)
제 6대 달문(達門)단군 BC 2083 (36)
제 7대 한율(翰栗)단군 BC 2047 (54)
제 8대 우서한(于西翰)단군 BC 1993 (8)
제 9대 아술(阿述)단군 BC 1985 (35)
제 10대 노을(魯乙)단군 BC 1950 (58)
제 11대 도해(道奚)단군 BC 1891 (58)
제 12대 아한(阿漢)단군 BC 1834 (52)
제 13대 흘달(屹達)단군 BC 1782 (61)
제 14대 고불(古弗)단군 BC 1721 (60)
제 15대 벌음(伐音)단군 BC 1661 (51)
제 16대 위나(尉那)단군 BC 1610 (58)
제 17대 여을(余乙)단군 BC 1552 (68)
제 18대 동엄(冬嚴)단군 BC 1484 (49)
제 19대 종년(縱年)단군 BC 1435 (55)
제 20대 고홀(固忽)단군 BC 1380 (43)
제 21대 소태(蘇台)단군 BC 1337 (52)
제 22대 색불루(索弗婁)단군 BC 1285 (48)
제 23대 아홀(阿忽)단군 BC 1237 (76)
제 24대 연나(延那)단군 BC 1161 (11)
제 25대 솔나(率那)단군 BC 1150 (88)
제 26대 추로(鄒魯)단군 BC 1062 (65)
제 27대 두밀(豆密)단군 BC 997 (26)
제 28대 해모(奚牟)단군 BC 971 (28)
제 29대 마휴(摩休)단군 BC 943 (34)
제 30대 나휴(奈休)단군 BC 909 (35)
제 31대 등올(登兀)단군 BC 874 (25)
제 32대 추밀(芻密)단군 BC 849 (30)
제 33대 감물(甘勿)단군 BC 819 (24)
제 34대 오루문(奧婁門)단군 BC 795 (23)
제 35대 사벌(沙伐)단군 BC 772 (68)
제 36대 매륵(買勒)단군 BC 704 (58)
제 37대 마물(摩勿)단군 BC 646 (45)
제 38대 다물(多勿)단군 BC 590 (45)
제 39대 두홀(豆忽)단군 BC 545 (36)
제 40대 달음(達音)단군 BC 509 (18)
제 41대 음차(音次)단군 BC 491 (20)
제 42대 을우지(乙于支)단군 BC 471 (10)
제 43대 물리(勿里)단군 BC 461 (25)
제 44대 구물(丘勿)단군 BC 425 (40)
제 45대 여루(余婁)단군 BC 396 (55)
제 46대 보을(普乙)단군 BC 341 (46)
제 47대 고열가(古(高)列加, (모병(某丙)단군 BC 295 (58)

단군조선(壇君朝鮮)은 제1대 단군왕검이 BC 2333년 부터 제47대 고열가( 모병)단군때인 BC 237년까지 2096년동안 실제로 존재했던 국가로, 환국(桓國) 배달국(倍達國) 다음으로 세번째로 등장한 우리 동이배달한민족(東夷培達韓民族)의 상고시대 국가이다. 단군왕검은 삼신오제교인 “수두교”를 만들어 요임금, 순임금, 하나라, 은(상)나라 그리고 주(周)나라때까지도 현 지나(支那)대륙(중국대륙)의 일반신앙으로 대 유행하였다. 우리 동이배달한민족의 상고사(上古史)는 환국(5038년간), 배달국(1565년간), 단군조선(2096년간), 북부여,동부여,남부여,졸본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대진(발해)까지로 약 9700년의 역사를 상고사라 한다. 10월3일 개천절(開天節)은 단군왕검(BC2333)부터가 아니고 배달국 환웅때( BC 3898)부터이다. 따라서 우리민족의 역사역년은 단기가 아니라 배달기(倍達期)로 금년(2010)은 5908년이다. 자신의 역사(歷史)를 낮게 보는 것은 사대주의(事大主意)이다.

한민족 사관정립 의식개혁회 제공

Monday, February 6, 2012

COREA part2

● Corea, the name of our country, in numerous records

Afterwards, the settled records of Corea(or Coree) as the name of our country are as follows: Italy called us Corea in 1296, Portugal used corea in 1513, during the war of 1606 between Japan and us, the name of a boy captured by Japan, was Antonio Corea. Beginning with the above mentioned, there is a map published by a Netherlander in 1594, a map made by the Portuguese in 1595, an Asian map made by a Netherlander in 1655, a map published by a Frenchman in 1705, a world map made by a German in 1720, a Chinese Empire map published by a Frenchman in 1748, a map made by a Frenchman in 1811, an East Asian map of John Tallis in 1851, a treaty of amity with America in 1882, a treaty of amity with England in 1883, on the cornerstone of the English consulate general in 1890, a map of Chosun published in America in 1894, New York Herald in 1895, a pamphlet of Academic association in Australian in 1895, and writing about Mongols by Jeremiah Curtin in 1908. All these documents recorded COREA(or Coree) as the name of our country, presently known as Korea. In short, from 1250 to 1895, the Latin alphabet ‘C’ had been used consistently, not ‘K’.

● The name of each country written in the Latin alphabet

The English language begins with the migration of the Jutes, Angles, and Saxons from Germany to England in the 5th and 6th centuries. Scholars generally date the beginning of modern English after 1500. It is said that the vocabulary of modern English is about half Germanic old language and half borrowed from Latin(Italian and Romans). The English language adopted the 23 letters of the Latin alphabet, except for 3 letters, W, J, and V, out of 26 letters. Latin was originally spoken by a small group of people living along the Tiber River. It spread with the expansion of Roman political power throughout Italy and then throughout most of western and southern Europe, as well as in the central western Mediterranean coastal regions of Africa. The modern Romans, namely, the Italian language, developed from the Latin language. It is a matter of common knowledge that the English language has been influenced by Latin. This goes without saying. Accordingly, it is taken for granted that people all over the world objectively accepted COREA as the name of our country since a French missionary, Guillaume de Rubruquis, in the first place, designated the name of our country as Caule(Corea).

● A name of our country, Korea, was fabricated by Japan

After a humiliating peace treaty with Japan made under Japanese military power on February 27, 1876, it seems that Japan fabricated our country’s name, Corea, as Korea, in order to colonize us. A pro-Japanese diplomat, William George Aston(4/9/1841-11/22/1911), who was a British consul residing in Tokyo, Kobe, and Nagasaki in Japan, took a positive attitude toward the Japanese by concocting a policy since 1878. According to historians of South and North Korea, “ An American missionary, Henry Gerhard Appenzeller(2/6/1858-6/11/1902), who was known as one of pro-Japanese people, published a magazine titled, “The Korean Repository”. In the December issue of 1897, he brought up an idea of which ‘K’ was better than ‘C’ reasoning on probable confusion with the pronunciation of ‘Ki-ok’ of ‘K’ and ‘Ci-oc’ of ‘C’, which discorded with each other in view of linguistical principles.” As mentioned in the beginning, Japan placed a Simanehyeon fisherman, Nakai Yosabro, as a puppet to forge that Dokdo was to be hers. By the same token, placing Appenzeller, who was pro-Japanese, and an American missionary, Japan dramatized it again.
What calculated, deliberate, and circumspect actions they were! However, the Japan empire used Korea in place of Corea in a thoroughly consistent manner since the annexation of Japan and Korea on August 22, 1910. And also it seems that Japan began to write "Sea of Japan" in lieu of "Sea of Corea" since the annexation.

● The reason of Japanese changing ‘K’ into ‘C’ and their thoughts

The most persuasive opinion that Japan fabricated the ‘C’ of our country’s name for ‘K’ is that nations are customarily placed in Latin alphabetical order in international society. On account of ‘J’of Japan coming after ‘C’of Corea, the Japanese empire thought it a shame that a colonial Corea was supposed to go before Japan, which was intolerable. Though it has been by 60 years since the liberation of Korea from Japan in 1945, we did not immediately straighten out our history, which was terribly distorted by Japan. As a result, Japan insists unreasonably that Dokdo island and the Sea of Korea are hers. Japanese people believe in a thought of ‘Unryoung(言靈)’, meaning that a divine spiritual power in words makes happen as what you say. It is pretty much the same as, “What you say is what becomes,” which is a Korean proverb. Japanese people preoccupied with ‘Unryoung’ tenaciously insist that our eastern sea and Dokdo are theirs.

● In conclusion, return to COREA

This is the year of the dragon, an imaginary animal which has been a symbol of Dongyibaedalhanminjok(東夷倍達韓民族). Welcoming a meaningful dragon year of 2012, we have to reinstate the remaining vestiges of the Japan empire, ranging from history, politics, system, speech, way of life, practices, to everything contaminated by Japan. The first thing we should do is to return from Korea to COREA, the name of our nation written in the Latin alphabet. Let’s go back to COREA which started from the 1250’s, and also use Sea of COREA, not East sea. We wisely changed the insulted name of ‘Gukminhakkyo (國民學敎)’ to ‘Chodenghakkyo(初等學敎)’, didn’t we? Why do you hold regard for peoples’ feelings in correcting wrong things? A book titled, “18 reasons that Koreans, not on your life, can not catch up with Japanese people” by Momose Tadasi(百瀨格: 백뢰격), indicates we Coreans do not try to correct what we know is wrong, even though we know it is wrong very well. Japanese people use this such weakness of us as well. Dokdo island in Sea of COREA is our own territory. Isn’t it?

COREA part 1

Returning to the name of COREA resolves problems arising from Dokdo and the East Sea.

● An act of aggression by Japan

Although Dokdo island is distinctly a Korean territory, Japan has insisted that not only it be hers but East Sea be the Sea of Japan as well. This action is a provocative invasion of our territorial soil and waters, which we cannot overlook. In order for Russia and Japan to gain sovereign control over our territory, the so called Gando; Hekryongkang-seong(黑龍江省), gillim-seong(吉林省), and Yoonyoung- seong(遼寧省) as well as the Korean peninsula, Japan declared war against Russia on February 8, 1904 and won the battle in Fall 1905 in a year and a half. In the midst of the war, during August 1904, the Japanese government tried to establish a military watchtower to observe Russian battleships on Dokdo island. Even though Japan knew that Dokdo island belonged to Korea, she played a dirty trick by placing a fisherman of Simanehyion(島根현) Nakai Yosabro(中井養三郞: 중정량삼랑)there. We all know the story goes as follows: “On September 29, 1904, Nakai Yoosabro requested to the departments of Foreign affairs, Internal affairs, and Agricultural and Commercial affairs that Dokdo island be annexed to Simanehyeon. As requested, the Japanese government incorporated it with a prior occupation, they claimed.
If it stands reason in such logic, a fisherman of Geojae(巨濟) island of Korea sends a petition to the Korean government requesting that Goojoo(九州) of Japanese territory be incorporated into Geojae island. Then the government accepts his request and can annex Goojoo to Geojae island as a Korean territory. In order to rationalize this trick, on January 28, 1905, the Japanese cabinet named Dokdo island Dakesiam(竹島) in Japanese, designated it as a part of Simanehyeon, and regarded it as the grounds of possession of Dokdo island.

● Do not forget Japanese brutality

In the same year of 1905, on November 17, the treaty of Eulsabohojoyaak, also known as Eulsanekyaak(乙巳勒約), was forcefully entered between Korea and the Japanese empire, regardless of our will, where the sovereignty of Korea(Daehan empire: Korea) was deprived. It was 102 years in passing since the annexation of Japan and Korea on August 22, 1910. During such a long period of time, the history of our country was distorted by Japan. Under the Japanese purging policy, we could not speak our own language. Japan deprived us of the freedom of speech, freedom of the press, freedom of assembly, and freedom of association and killed a numerous amount of our patriots. Also, we suffered from emotional and mental distress aroused from a inferiority complex as people of the Japanese colony. 100 years is a long time. There has come a time now for us to attempt a revolutionary reformation of consciousness along with our awakening. It is time to undo everything that has been messed up by the Japanese empire with the revival of the self-respect and indomitable spirit of Dongyibaedalhanminjok(東夷倍達韓民族: 동이배달한민족,a nomadic tribe from a high mountain-region who lived in northeastern Asia who were heavenly-descended skillful bow handlers with an awakening of truth).

● No confidence of victory with Donghae(東海: East sea)

There is no confidence and just cause with Donghae(East sea) in the event that tricky Japan insists it as the Sea of Japan. The name of our country was originally COREA and the Eastern sea of the Korean peninsula, Dokdo, was called the SEA OF COREA. Donghae(East sea) is not a concept of possession but a mere direction and orientation. It is of no use to blame Japan without changing ourselves. The Japanese absurd insistence is a natural result from our wrong way of thinking. The fundamental thing is to get rid of the remaining vestiges of Japanese imperialism and not only to reinstate the name of our country as COREA but also to restore the SEA OF COREA. Using COREA, the original name of our country, solves naturally the problems of Dokdo island and the sea of East.

● The origin of Caule(Cauly) is from Gaule(高句麗: G sounds the same as C in Korean)

The origin of the name of our country written in the Latin alphabet seems to be derived from Gaule that ruled and controlled the whole Asian continent for 900 years from BC231 to AD 668. Joomong(朱蒙: Chumo, Jumong, Dongmyoung ) emperor, the founder of the country, built a Helsenggol (紇升骨)castle as a capital city at Jolbon river(卒本川) and named Gaule for his country. Gaule is a Yidu language called as such during about 1141-1107. It seems that the Yidu language was called as Hanseo, Gukseo, or Gamyoung during the Gaule dynasty. In other words, the name of the country was called Gaule(高句麗) in our phonetic language. When Gaule is written in Hanja(漢字: also known as Chinese character), it goes by Ga(高), u(句), le(麗), so to speak, Gaule(高句麗). Hanja(漢字), as pictographs, was created by Baedal country(倍達國: Baedal means ‘awakening of the truth’) in BC3898 according to our history. Gamyoung(假名), as phonetic signs of 38 letters, was invented by a scholar named Elborek in BC2181. This Gamyoung is the predecessor of Hangel, the present Korean phonetic language. Our ancestors from BC2181 to about AD1300 seemed to use both pictographs, Hanja and phonetic symbols, Gamyoung. The reason I insist this is that we Koreans pronounce one character of Hanja(漢字) as one word whereas those of Jina(支那: means a lot of small branches; present China) pronounce one character Hanja usually by two words. Take DANGUNJOSEON(壇君朝鮮) for example, we Koreans pronounce Dan(壇) gun(君) jo(朝) seon(鮮), while Chinese people pronounce them as Tan(壇) tzw-in(君) cha-u(朝) she-en(鮮). It is evident that Hangel is a standard language as shown above. Accordingly, it seems that at the time of the foundation of Gaule(高句麗), Chinese people pronounced Ga(高) for Ga-u, gu(句) for gu, le(麗) for le respectively. Therefore, they pronounce Gaule for 高麗 instead of 高句麗, eliminating gu(句) in the middle of 高句麗. In other words, as far as the pronunciation is concerned, Gaule(高句麗) is the same as Gaule(高麗). In evidence, out of 25-authentic history books from China, 6 history books such as Juseo(周書), Suseo(隋書), Buksa(北史), Gudangseo(舊唐書), Sindangseo(新唐書),and Songsa(宋史),recorded Gaule(高麗: two words) instead of Gaule(高句麗: three words).

● Transformation from Caule(Gaule) to COREA

The original name of our country, in record, written in Latin( Roman), was expressed by a French missionary named Guillaume de Rubruquis, who went to the king of Mongol( China: 1271-1368, the capital was in Peking) with a personal letter from Louis IX in order to urge to bring about war to recapture the holy place with Christians. Returning to his country from Mongol(China), Rubruquis presented to Louis IX a written report , which bears, “To the East of China is a country of Caule”. This is the first of our country’s name written in Latin. Needless to say, in 1255, the country of Caule was not Caule(高句麗: Goguryea in Korean present way), but Caule(高麗: Goryeo,and the capital was in Simyang瀋陽, Yonyoung province) founded by emperor Wanggeon(王建). Goryeo succeeded to Goguryea, and the sea to the East of our peninsula was called East Sea, which meant eastern direction. It is evident that until 1255, Chinese people seemed to call us Caule as our country’s name, Caule,as in Rubruquis’ report. Besides this, Marco Polo(1254-1324) who was Italian, followed his father to Won(元: Mongol, China: the capital was in Peking) and stayed there for 17 years and came back to his country in 1292. When he stayed in China, he traveled to many countries in Asia continent during 17 years. In ‘Le Livre des Mervelles’, published on the basis of Marco Polo’s traveling experiences, our country, Korea, was spelled, Cauly. This Caule(Cauly) is the origin of Corea. Afterwards, it seems that Chinese people pronounced Cau(高) for ‘Co’, and those of Goryeo(高麗) pronounced it also as ‘Co’. The reason I insist this is that currently in 2012, Chinese people say Cau(高) as ‘Co’ and le(麗) as ‘le’ as yet. Consequently, the name of our country, Caule, written in Latin, transferred naturally and apparently to COREA. Because the pronunciation of Corea in modern English is exactly the same phonetic symbols of Korean and the English alphabet ‘C’ sounds like ‘K’ and the alphabet ‘O’ sounds ‘ou’ in phonetic symbols. It is obviously true that COREA, the name of our country, came into existence because of Gamyoung(Yidu: preceding name of Hangel(also known as Korean language). Nobody can deny it. In short, in Western countries, the name of our country was written in and known by the Latin alphabet ‘C’ since 1255, which means very import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