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February 23, 2012

신라가 한반도(韓半島)에 있지 않았다는 이유. 제4부

● 여섯째: 운주(運州)는 한반도가 아니다.
“신라 56대 경순왕 8년(934) 가을 9월에 운주(運州)지경(地境)의 30여 군(郡), 현(縣)이 태조(太祖: 고려 왕건)에게 항복했다.”라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운주(運州)는 현 산서성(山西城) 황하강(黃河江)이 꺾이는 지점에 있는 영제현(永濟縣) 동북으로 현 대륙지도상에 운성시(運城市)이다. 이 운성시(運城市) 서남 쪽이 바로 그 유명한 탁록(涿鹿: 산서성 서쪽 최남부 운성염지運城鹽池가 2009년 현재 해지解池로 이름이 바뀌고 그 일대인 당시의 탁록은 지금은 해주解州라 부름)으로 치우천황과 황제헌원이 10년간 싸운 곳이다. 시중에 나와있는 <삼국사기>에는 운주(運州)를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洪城)’이라고 친절하게 주해를 달아 놓았다. 말하자면 이곳 홍성 근처에서 치우(蚩尤)와 지나인 (支那人)들이 자신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헌원(軒轅)이 BC2707부터 BC2697까지 10년간 73회를 싸웠다는 말과 같다. 이웃집 닭이 웃을 일이다. 이것 또한 일본인들과 식민사학(植民史學)의 역사 날조(捏造)인 것이다. 신라는 한반도에 있지않았다.

● 일곱째: 임나(任那)는 절강성에 있다.
한반도 김해에 6개의 가락국(駕洛國)중 금관가락국이 제일 큰데 이 금관가락국이 있었던 곳인 임나(任那)에 야마토(大化) 일본이 궁가(宮家: 미야께)라는 통치기관 을 설치해 놓고 백제, 신라를 속국으로 만들었다는 “임나 일본부설”로 일본인들은 한반도 남쪽 가야국이 있었던 곳에 임나가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한반도(韓半島)남쪽에는 가야국(伽倻國)도 신라(新羅)도 없었다. 당시 김 수로왕의 가락국(駕洛國: 가야국伽耶國)은 절강성(浙江省)에 있었다. 임나는 무지절독 (武持節督)으로 ‘무사나 무인들이 뭉쳐서 이루어진 군사기지 같은것’이다. 임나(任那)는 지나대륙 (支那大陸) 절강성(浙江省) 임해(臨海: 김해金海)가 있는곳에 있었으며 백제(百濟)의 속국으로 백제가 망(亡)하면서 임나(任那)도 망한다. 이들의 주장은 거짓으로 임나는 한반도에 있지도 않았다.

● 여덟번째: 경주에는 왕들의 묘와 묘비가 없다.
한반도 경상도에 1,000년 사직(社稷: 나라)의 신라(新羅)가 있었다면 신라왕들의 묘(墓)가 모두 경상남북도에 있어야 한다. 다시말하면 한반도 경상남도 경주(慶州)에 1,000년동안 도읍지(都邑地)였던 왕궁터, 56명의 신라왕들의 묘(墓), 왕들의 묘비(墓碑)가 있어야 한다.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고낭포리에 신라(新羅)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의 릉(陵)이 있고 비각(碑閣)이 있다고 말할 분들도 있으리라 본다. 그러나 그 묘(墓)는 진짜묘가 아니고 비(碑)가있다면 그 비석 (碑石)은 이씨조선때 세운 비(碑)가 분명하다. 의심스러우면 Carbon-14 (탄소 년대 측정 법) 방법으로 한반도(韓半島)에있는 모든 묘지와 비석을 년대측정(年代測定)하면 간단히 풀리게 될 문제라 본다. 한반도 경상남도는 말할 것도 없고 한반도 (韓半島) 어느곳에도 신라왕의 묘지(墓地)가 있다고 기록된 사서(史書)는 없다. 천년 사직(社稷: 나라)인 한반도 경주에 왕궁터도, 황제(皇帝: 당나라 고종이 신라 29대 무열왕 김춘추를 ‘태종황제’ 라했다)들의 묘도, 묘비도 없다는 것은 무엇을 시사(示唆)하는가! 촌부(村婦: 시골 여자)가 죽어도 묘비를 쓰는데 하물며 천자국(天子國)인 대신라국(大新羅國) 왕들의 묘(墓)와 묘비(墓碑)가 없다니….. 신라는 한반도에 있지않았기 때문이다.

● 아홉번째: 계백장군이 싸운 황산(黃山)은 연산 벌판이 아니다.
<삼국사기> 제2권 백제6, 의자왕20년(660) 5월의기록을 보면, “ 당(唐)나라와 신라 군사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말을 듣고 왕(의자왕)은 계백(階伯) 장군을 보내어 결사대 5천명을 거느리고 황산(黃山)에 나아가 신라(新羅) 군사와 싸우게했다. 4번 싸워 4번 다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서 마침내 패전하여 계백이 전사했다. 이때 계백(階伯)장군이 마지막으로 싸운 황산(黃山)은 한반도 충청남도 연산 벌판이 아니고 지나(支那)대륙인 것이다. 안휘성(安徽省), 절강성 (浙江省) 강서성(江西省)이 서로만나는 곳에 황산(黃山)이 있고 당시 백제(百濟)의 사비성(泗沘城)은 황산 바로 윗쪽 현 대륙지도에 양자강(揚子江) 바로밑 청양(靑陽) 이라는 곳이다. 현 대륙지도(大陸地圖)에는 황산(黃山: 경도 118.276도 위도 29.926도의 위치)이라고 글자 한자 틀리지않고 그대로 남아있다. 신라는 대륙에 있었다.

● 열번째: 이하(泥河)와 당항성(黨項城)은 한반도에 없다.
“20대 자비마립간 11년 (AD468) 봄에 고구려와 말갈(靺鞨)이 북쪽 변경의 실직성(悉直城)을 습격했다. 가을 9월에 15세 이상된 하슬라(何瑟羅) 사람을 징발하여 성(城)을 이하(泥河)에 쌓았다.”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이하(泥河)는 하남성(河南省)과 안휘성(安徽省) 사이로 하남성에 있는 강(江)인데 이하(泥河)바로위에 항성(項城)이 있어 이 항성이 이때 쌓은 성(城)으로 보인다. 그 유명한 당항성(黨項城)이 바로 이 항성(項城)을 일컫는 것이다. 이 당항성은 신라가 당시 섬서성(陝西省) 서안 (西安)에 있는 당(唐) 나라로 들어가는 관문(關門)으로 27대 선덕왕 11년(642)에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의 연합군에게 이 당항성(黨項城)을빼앗김으로써 김 춘추가 이민족(異民族)인 당(唐)나라 고종 이치(李治)에게 “ 당(唐)나라로 들어오는 당항성을 고구려와 백제에게 빼앗겨 더 이상 당나라에 들어올 수 없으니 신라와 당이 연합하여 이들 백제와 고구려를 말망시키자는” 동이배달한민족(東夷倍達韓民族)의 민족상잔(民族相殘)의 비극의 불씨가 바로 이 이하(泥河)에 있던 당항성(黨項城) 때문으로 보여진다. 현 대륙지도 하남성(河南省)에 항성(項城)과 이하(泥河)가 글씨 하나 틀리지않고 그대로 남아있다.
한반도 어느곳에 이하(泥河)란 하천과 항성(項城)이란 지명이 있는지? 식민반도사학(植民半島史學)에게 정중히 묻는 바이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