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February 23, 2012

신라(新羅)는 한반도(韓半島)에 있지않았다. 제2부

● 신라 최초의 도읍지(都邑地)인 금성(金城)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그 밖의 어떤 사서(史書)에도 신라가 언제 어느때 정확하게 도읍지(都邑地)를 옮겼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다만 당시의 여러가지 앞뒤 정황(情況)을 고려하여 유추(類推)가 가능 할 뿐이다. 신라(新羅)는 992년 동안 도읍지를 최소한 10번 이상 옮긴 것으로 보여진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 에 의하면, 금성(金城)은 감숙성(甘肅省) 난주(蘭州)에 있다. 감숙성 난주는 비단길(Silk Road) 을 연 곳으로 혁거세거서간 17년(BC41)에 왕이 6부(여섯 촌)를 순회하면서 농사짓기와 뽕나무 기르기를 권장하고 독려 (督勵) 했다는 기록이 있다. “시조 혁거세거서간 21년(BC37)에 서울에 성(城)을 쌓아 이름을 금성(金城)이라 했다.”라고 <삼국 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금성은 두번째의 금성으로 산서성 임분시(臨汾市)에 있는 금성을 뜻한 것으로 보여진다.
< 대당고 김씨부인 묘명>의 기록대로, “ 한(漢)나라에 난리가 나서 난을 피해 멀리 피난하였다. 우리 집안은 요동(遼東)에 숨어 살게 되었다.”라고 하는 요동(遼東)이 바로 산서성 (山西省)이기 때문이다. 제2대 남해차차웅 원년(AD4) 가을 7월과 11년(AD14)에 낙랑(樂浪: 하남성 낙양 북부를 포함하여 산서성 남,동부 패수가 흐르는 패수현의 원곡일대) 군사가 금성(金城)을 공격한 기록이 보이며, 20년 (AD23) 가을에 ‘금성(金星)이 태미성(太微星)자리에 들어갔다.’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당시 엄청난 사건(事件)이 일어난 것을 은유적(隱喩的)으로 기록한 것 같은데 필자는 아직 그 진의(眞義)를 알지못하겠다. 이때는 고구려와 신라가 함께 산서성(山西省)안에 이웃해 있을 당시로 신라(금성金星)가 고구려 (태미성太微星)에 흡수되었거나 고구려의 백성이 되었음을 암시한다. 그 근거로 신라(新羅)는 고구려(高句麗)와 AD245년까지 서로 전쟁(戰爭)을 한 기록이 보이지않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잡지 제3 지리1’의 기록에, “문무왕 20년(680)에 김해(金海: 김수로 왕의 가락국이 있던 절강성 현 임해)를 소경(小京: 작은 도읍지)으로 삼았다.” 그후 신라의 황금기를 이룬 35대 경덕왕 16년(757)에는 전주, 양주, 웅주, 한주, 삭주 5곳에 소경(小京: 작은 도읍지都邑地)를 두었다는 기록 등으로 보아 신라는 최소한 10곳 이상의 도읍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강소성(江蘇省)으로 도읍을 옮김
신라 11대 “조비이사금 16년 (AD245)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북쪽변경을 침입하므로 우로(于老)가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서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마두책 (馬頭柵)을 지켰다.”라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어 AD245년에 비로서 신라와 고구려 사이의 최초의 전쟁이 있었다. 그러나 신라는 4대 탈해이사금 8년(AD64)부터 백제(百濟)와 계속되는 영토전쟁을 한다. 이런 상황으로 보아 이때 신라(新羅)가 도성(都城)을 세번째로 대륙의 가장 동쪽에 있는 강소성(江蘇省)으로 옮긴 것으로 보아진다. 그 근거로 “3대 유리 이사금13년(AD36)가을 8월에 낙랑(樂浪)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을 공격 침략시켰다.”라고 되어있어 금성(金城)이 산서성(山西城) 임분시에 있었다면 낙랑(樂浪)의 북쪽 공격은 논리가 맞지 않기때문이다. 왜냐하면 신라의 북쪽은 고구려의 영토이기 때문이다. 또한 14년 (AD37)에 고구려가 낙랑을 쳐서 멸망(滅亡)시키니 낙랑 사람 5천명이 와서 신라에 의지했다. 이때 고구려의 도성은 계속 산서성(山西省)에 있을 때이다. 5대 파사이사금 22년(AD101) 봄 2월에 성(城)을 쌓아 월성(月城)이라 하고 가을 7월에 왕이 월성으로 옮겨가 거처했다. 월성(月城)은 현 강소성(江蘇省) 염성(鹽城)으로 신라의 4번째의 천도(遷都)가 된다. 9대 벌휴이사금 13년(AD196) 4월 궁궐의 남쪽에 있는 큰 나무에 벼락이 치고 금성(金城)의 동문에 벼락이 쳤다. 이 금성은 강소성 서북쪽 연수현(連水縣)의 금성(金城)으로 보이며 언제 쌓았는지는 알 길이없다. 그러나 감숙성 난주(蘭州)와 산서성 운성시(運城市)의 왕도(王都)를 동쪽 강소성 (江蘇省)으로 옮기면서 금성(金城)이란 이름도 함께 옮긴 것 으로 보인다. 도읍지(都邑地)를 옮길때는 도성(都城)의 이름도 함께 따라다니는 것을 고대사 (古代史)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 가야국의 침범
6대 지미이사금 4년(AD115) 봄 2월에 가야(伽倻)가 남쪽변경을 침범했다. 가을 7월에 왕이 친히 가야를 정벌했는데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황산하 (黃山河)를 건넜다. 황산하는 황산 (黃山)이있는 안휘성(安徽城)으로 김수로(金 首露) 왕의 가야국(伽耶國: 가락국, 금관가야국)이 있던 절강성(浙江城)과의 경계지역의 하천(河川) 이다. 당시 가락국의 도읍지는 절강성 낙청(樂淸)이란 곳이다. 낙청은 경도 121.017도 위도 28.162도의 위치이다. 신라와 가락국이 서로 인접하고 있었기에 가야가 신라의 남쪽 변경을 침입한 것이다. 이같은 정황으로 보아 신라는 산서성(山西省) 임분시의 금성(金城)에서 2대 남해차차웅 20년(AD23) 경에 강소성 (江蘇省)으로 수도(首都)을 옮긴 것이 분명해진다. 이밖에도 월성(月城)과 명활성(明活城) 의 기록이 보인다. 금성(金城)은 신라의 최초의 왕도 (王都)로 한반도(韓半島)에 금성(金城)이 있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금성(金城)이란 쇠붙이와 주물로 만든 성(城)이란 뜻으로 쇠금자(金)를 사용한 것만 보더라도 당시 신라인들이 얼마나 금속을 잘 다루었는가를 짐작케 한다.

● 신라의 국호(國號)와 다섯곳의 서울(小京)
신라는 개국(開國)초부터 신라(新羅)란 국호를 사용하지않았다. 처음에는 서나벌 (徐那伐)이라하고 계림(鷄林), 사라(斯羅), 사로(斯盧)등으로 부르다가 제 22대 지증마립간(지증왕) 4년( AD503) 겨울 10월에 비로서 신라(新羅)로 국호를 정하고 ‘신라국왕’이라는 존호(尊號)를 사용한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제4대 탈해이사금 9년( AD65) 봄 3월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에서 닭이 울어서 호공을 보내어 살펴보니 금빛 상자가 있어서 가지고와 열어보니 사내 아이가 있었다. 길렀는데 자라나서 총명하고 지략(知略 )이 많아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김(金)씨라 했으며 금성(金城)의 서쪽 시림을 고쳐서 계림 (鷄林)이라하고 국호(國號)를 계림이라고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제3대 유리이사금 9년(AD32) 봄에 6부의 이름을 개정하고 이에 이(李), 최(崔), 손(孫), 정(鄭), 배(裵), 설(薛)이라는 6가지 성(姓)을 내렸다. 제31대 신문왕(678-689) 5년(685) 다시 완산주를 설치하고 용원(龍元)을 총관(總管)으로 삼았다. 거열주 (居列州)를 승격시켜 청주(菁州)를 설치하니 비로서 9주(九州)가 갖추어졌다. 신문왕 때에 삼한(三韓) 즉,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이 통일(統一) 되었다는 기록이다. 제35대 경덕왕 16년(757) 겨울 12월에 사벌주를 고쳐서 상주(尙州: 요녕성), 삽량주를 고쳐서 양주(良州: 강소성), 청주를 고쳐서 강주(康州: 광동성), 한산주를 고쳐서 한주(漢州: 사천성), 수약주를 고쳐서 삭주(朔州: 산서성), 웅천주를 고쳐서 웅주(熊州: 호북성), 하서주를 고쳐서 명주(溟州: 신강성), 완산주를 고쳐서 전주(全州: 하북성), 무진주를 고쳐서 무주(武州: 감숙성)라 하고, 전주(全州), 양주(良州), 웅주(熊州), 한주(漢州), 삭주(朔州) 5곳에 수도(首都: 서울) 를 두었다. 청(淸)나라 건륭 42년(1777)에 한림원에서 발행한 <만주원류고>에 의하면, ‘구당서’와 ‘신당서’를 인용하면서 “계림(鷄林)은 현재(1777년 당시의 청나라)의 길림(吉林: 길림성의 길림으로 경도 126.735도 위도 43.897도의 위치)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당시 신라의 9주(九州)의 강역이 간도땅까지 포함된 것으로 되어 있다. 신라의 9주를 다시 요약하면, 당(唐)나라가 있던 섬서성 서안(西安)과 하남성 서부 일부를 제외한 지나(支那) 전대륙(全大陸)이 신라의 영토가 된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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