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January 31, 2012

COREA로 국호를 되돌리면 독도와 동해문제는 해결. 제2부

● 수많은 기록속에 우리의 국호는 Corea

그후 한국의 국호가 Corea(혹은 Coree)로 정착된 기록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296년 이탈리아에서 Corea로, 1513년 포루투칼에서 Corea로, 1606년 임진왜란 때 잡혀간 조선 소년의 이름이 Antonio Corea를 비롯해서 1594년 네델란드인 빼뜨로 프란치오의 세계지도, 1595년 포루투칼인 아놀드 랑글렌의 지도, 1635년 네델란드인 윌리엄 브라우의 아시아지도, 1655년 네델란드인 얀블라우의 일본지도, 1705년 프랑스인 기욤드릴의 지도, 1720년 독일인 요한 호만의 세계지도, 1748년 프랑스인 파르 엠 본(Par M. Bonne)의 중국제국지도, , 1811년 프랑스인 들라마르쉬의 지도, 1851 년 영국인 죤 탤리스(John Tallis)의 동아시아 지도, 1882년 한미 수호 통상조약에, 1883년 한영 수호통상조약에, 1890년 7월 19일 영국 대사관 건물 초석에, 1894년 미국에서 발행된 조선지도, 1895년 7월 15일자 뉴욕 헤럴드신문, 1895년 호주 학술진흥학회의 소책자, 1908년 줴러마이어 커튼(Jeremiah Curtin: 1835-1906)의 몽골이란 글등에 모두 한국(韓國)의 국호를 Corea 혹은 Coree로 기록하고 있다. 간단히 요약하면 1250년대부터 1895년 까지 ‘K’가아닌 ‘C’로 시작된 Corea의 철자로 일관되었다.

● 각국의 국호는 라틴어 앨퍼벹으로

영어(英語: English)는주트족(Jutes), 앵겔스족(Angles), 쌕쓴족(Saxons)들이5-6세기 영국을 침입하고 정복하므로 시작되었으며 이들부족들은 게르만 민족(현재의 독일 민족)이다.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현대 영어를 1500년 이후부터로 본다. 현대 영어 어휘 절반가량은 게르만족의 고대 언어이고 약 절반가량은 라틴어(Latin) 즉 이탈리아어(로마어)에서 빌려온 것들이다. 영어의 26개의 앨퍼벹(Alphabet)중 W,J,V 3글자를 제외한 23글자를 라틴어 앨퍼벹(Latin Alphabet:즉 로마어)에서 채택하여 사용하고 있다. 라틴어의 기원을 보면 처음에 로마 타이버 뤼버(Tiber River: 테베레 강)하류에 살던 소수 집단이 사용하던 것이 로마제국의 영토와 정치력이 확장되면서 이탈리아 전역을 걸쳐 대부분의 남.서 유럽과 중앙 서부 지중해와 아프리카 해안지방까지 확대된 곳에서 널리 사용되던 언어이다. 현대의 로마어 즉 이탈리아어는 이렇게 라틴어에서 발전된 것이며 영어 역시 라틴어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1255년 프랑스의 선교사 뤼브뤼키(Guillaume de Rubruquis)가 최초의 한국 국호(韓國國號) 라틴어(영문) 표기를 Caule(Corea)로 명명한 것은 당시 전세계의 언어인 라틴어로 표기되었다는 점에서 전세계인들이 객관적으로 우리 한국의 국호가 COREA임을 인정(認定)했던 것이 된다.

● 일제가 날조한 우리의 국호 Korea

1876년 2월 27일 일제의 무력시위에 의해 강압으로 체결된 조일 수호조약 (朝日修好條約: 강화조약) 후 한국(대한제국,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하여 우리의 국호인 Corea를 Korea로 날조한 것으로 보인다. 친일적인 외교관 윌리암 조지 아스톤(William George Aston: 4/91841-11/22/1911, 당시 Tokyo동경, Kobe신호시, Nagasaki장기시 주제 영국 영사)은 1878년 이후 일제의 날조 정책에 발 벗고 나섰고 남북 역사학자들에 주장에 의하면, “친일파로 알려진 당시 미국선교사 아펜젤러( Henry Gerhard Appenzeller: 2/6/1858-6/11/1902)가 간행했던 잡지 <코리안 리포지터리: The Korean Repository> 1897년 12월호에 C보다K를 쓰는 것이 좋은 이유로서 문자 K는 읽을 때 ‘기억: Ki-ok’으로 발음하는데 문자 C는 ‘시억: Ci-oc’으로 옮겨져 혼돈하게 될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언어학적 원리에 맞지 않는 표기로 간주하였던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같이 일본이 독도를 지네 것이라고 날조하기위해 시마네현 어부 나까이 요사브로를 허수아비로 내세운 것처럼 여기서도 미국 선교사이자 친일인사인 아펜젤러를 내세워 각색을한 것이다. 이 얼마나 계획적이고 용의주도(用意周到)한 짓인가! 그러나 1910년 8월22일 한일합방후 일제는 일사불란하게 Corea대신 Korea로 사용한다. 또한 한일합방 이후부터 일제는 우리의 한국해(Sea of Corea)를 일본해(Sea of Japan)로 표기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 일본이 국호를 K로 바꾼 이유와 사상

일제(日帝)가 한국의 국호를 C에서 K로 날조(捏造)한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은 국제 사회에서는 라틴어(Latin: 로마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네델란드어, 포루투칼어, 영어등의 모체) 앨퍼벹 순서로 배열 혹은 서열을 나누는 것이 관례로 Japan의 J는 Corea의 C보다 뒷 서열이기 때문에 일본의 식민지인 Corea가 자신들보다 앞서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수치라는 생각에 일제가 우리 보다 순서를 앞서기 위해 의도적 (意圖的)으로 C에서 K로 바꾼 것이다. 식민지로 부터 해방된지 60년이 흘렀지만 일제가 왜곡한 역사를 즉시 바로잡지 못한 결과 독도와 동쪽의 바다가 자기네 것이라고 억지 주장하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언령(言靈)’의 사상(思想)을 굳게 믿는 민족이다. 언령(言靈)이란 “말속에는 신령한 힘이 있어 말한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상이다. 우리속담의 “말이 씨된다.”는 말과 일맥상통한 일본의 사상이다. 그런 정신적 사상으로 무장한 일본인들이 독도(獨島)와 우리 동쪽의 바다를 일본 것이라고 집요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 결론은COREA로 되돌려야

상상적인 동물인 용(龍: Dragon)은 옛부터 우리 동이배달한민족(東夷倍達韓民族)의 상징이다. 2012년 뜻 깊은 용의해를 맞아 일제가 날조, 왜곡, 조작한 그리고 더럽게오염시킨 모든 역사, 정치, 제도, 언어, 문화, 생활 습관, 풍습등 잔재(殘在) 모두를 총 망라하여 제자리로 돌리자! 그 첫번째가 바로 한국의 로마자(라틴어) 국호인 Korea를 COREA로 되돌리는 일이다. 1250년대 부터 사용해 오던 우리의 국호인 COREA로 환원시키고 동시에 동해(East Sea)가 아닌 한국해(Sea of COREA)로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일제가 모욕적인 뜻으로 부르던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슬기롭게 바꾸지 않았는가? 잘못된 일을 바로잡는데 왜 남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가? 일본인 모모세 타다시(百瀨格: 백뢰격)가 쓴 <한국이 죽어도 일본을 못 따라잡는 18가지 이유>란 책에서와 같이 우리민족은 잘못을 알면서도 그것을 고치려하지 않는다. 일본인들은 우리의 약점인 그점을 잘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해(Sea of COREA) 안에 있는 독도(獨島)는 우리의 고유한 영토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COREA로 국호를 되돌리면 독도와 동해문제는 해결. 제1부

● 일본의 한국 영토 영해 침략 행위

독도(獨島)는 엄연히 대한민국의 영토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왜)은 독도를 자기의 영토라고 주장할뿐만 아니라 한반도 동쪽 바다인 동해(東海)를 일본해(日本海: Sea of Japan)라고 우기고 있다. 이러한 행위는 대한민국 영토 영해 침략과 같은 도발행위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러시아와 일본이 우리의 영토 간도(間島: 흑룡강성, 길림성, 요녕성)와 한반도에 대한 주도권을 얻기위해 일본은 1904년 2월 8일 러시아에 선전포고로 전쟁에 돌입하여 1905년 가을까지 약 1년 반의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다. 전쟁이 한창이던 1904년 8월 일본 정부는 러시아 군함을 감시하기 위하여 독도에 군사용 망루를 설치하려고 한다. 독도(獨島)가 대한제국(大韓帝國: 조선)의 영토임을 모르지 않는 일본은 간교(奸巧)한 방법으로 시마네현 어부 나까이 요사브로(中井養三郎)을 앞잡이로 내세워 연극을 시작했다. 그 내용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있는 것으로 다음과 같다. “ 1904년 9월 29일 시마네현 어부 나까이 요사브로가 일본 외무성, 내무성, 농상무성에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시켜 주라는 요청을 받아 일본 정부가 독도를 시마네현에 소속시켜 일본의 영토로 선점 편입했다는 주장이다.” 이런 논리라면 거제도에 살고있는 한 어민이 대한민국의 외무부, 내무부, 농수산부에 서한을 보내 경상남도 거제도에 일본 땅 구주(九州)를 편입시켜 주라고 요청하면 대한민국 정부가 그의 요청을 받아들여 일본 영토 구주는 대한민국의 영토가 될 수 있다는 이론과 같다. 일본은 연극을 보다 더 합리화하기 위해 1905년 1월 28일 일본내각이 우리의 영토 독도(獨島)를 일본말로 ‘다케시마(竹島)’ 란 명칭으로 바꿔 시마네현 관할로 지정 의결하고,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를 공포하여 독도 영유권 주장의 근거로 삼고있는 것이다.

● 일제의 만행 잊으면 안돼

같은 해인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보호조약 일명 을사늑약 (乙巳勒約)이 우리 정부의 의사(意思)와 관계없이 강제로 체결되었다. 1910년 8월 22일 한.일 합방으로 부터 금년 2012년은 102년이 되는 해이다. 그동안 일제에 의해 민족사가 왜곡되고, 민족 말살정책을 내세운 일제하에서 우리가 우리 말을 사용하지 못했으며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유린당하고 정치탄압으로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죽어갔다. 또한 식민지인(植民地人)이란 열등감을 유발시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정신적 심적 고통을 받아 왔었다. 100년은 긴 세월이다. 이제 우리 민족은 대오각성(大悟覺醒: 크게 깨달아 정신을 차림)하여 민족의식혁명 (民族意識革命)을 시도 할 때가 되었다. 동이배달한민족 (東夷倍達韓民族)의 자존심 회복과 불굴의 민족정기(民族精氣)를 되살려 그동안 일제가 망쳐놓은 잘못된 모든 것들을 원상복귀 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 동해로는 승산이 없어

간계(奸計)한 일본이 일본해(Sea of Japan)를 주장하는 지금 동해(東海)로는 승산(勝算)도 명분도 없다. 동해(東海: 동쪽의 바다)는 방향 설정이지 소유의 개념이 아니다. 우리의 국호는 처음부터 COREA이고 동쪽의 바다는 한국해(Sea of Corea)였다. 한국해(韓國海)라고 주장해야 대한민국의 소유가 된다. 우리 민족 스스로가 바뀌지 않고 일본을 탓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민족의 잘못된 의식구조(意識構造) 때문에 생긴 당연한 결과이다. 일제 잔제을 청산하는 가장 근본적인 일이 바로 국호를 원상태인 COREA로 되돌리는 동시에 동해가 아닌 한국해(Sea of Corea)로 원상복귀 하는 일이다. 원래의 국호인 COREA를 사용하게되면 독도(獨島)문제와 동해(東海) 문제는 자연히 해결된다.

● Caule(Cauly)의 어원은 가우리(高句麗)에서

라틴어 앨퍼벹 (Latin Alphabet)으로 표기한 한국(韓國)국호의 시원(始原)은 900년간 아시아 대륙을 지배한 가우리(高句麗)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주몽(朱蒙: 추모, 중모, 동명성왕) 황제가 졸본천(卒本川)의 흘승골성(紇升骨城)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가우리”라고 한다. 가우리는 이두어이다. 물론 당시에는 이두어라고 부르지 않고 단군조선(壇君朝鮮)때 부터 부르던 ‘향서’나 ‘국서’나 ‘가명’등으로 불렀을 것으로 보인다. 쉽게 말하면 우리의 소리글인 한글로 국호를 “가우리”라 했던 것이다. 가우리를 한자로 표기하면 가(高) 우(句) 리(麗) 즉, 高句麗(고구려)인 것이다. 한자는 배달국(倍達國: BC3898)때 만들어진 동이배달한민족의 뜻글자로 단군조선때는 뜻글자인 진서(眞書: 참글로 한자漢字의 전신)와 소리글자인 가명(假名: 3대 가륵단군 때인 BC2181년 을보륵이 가림토 38글자를 만들어 이것이 한글의 전신이며 당시에는 향서, 국서, 가명 등으로 불렀고 신라때는 향찰, 고려 중렵때는 이두, 이씨조선시는 언문, 암클, 국문, 한글로 부름)을 함께 사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 이유는, 우리는 한자(漢字) 한 글자를 한가지 음(音)으로 발음하지만 지나(支那) 사람들은 대개 2음으로 발음한다. 예를들면 단군조선를 한자로 표기하면 ‘壇君朝鮮’이고 한글로 읽으면 ‘단군조선’으로 한 글자를 한 음으로 발음한다. 그러나 지나인들은 단(壇)을 ‘탄’으로, 군(君)을 ‘쮜인’으로, 조(朝)를 ‘차우’로 선(鮮)을 ‘쉬엔’으로 한자(漢字) 한글자를 2음으로 발음하다. ‘단군조선’ ‘탄 쮜인 차우 쉬엔’ 어느쪽이 표준어인가! 당연히 한글이 표준어인 것이다. 지금의 지나인들은 고(高)를 ‘꼬우’로 발음하고, 구(句)는 ‘쮜’로 발음하며, 려(麗)는 지금도 ‘리’로 발음하고 있다. 가우리 건국당시 高(가)를 지나인들은 ‘가우’ 로 발음하고 句(구)는 ‘구’로 麗(리)는 ‘리’로 발음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가우리’을 한자로 표기하면 ‘高句麗’인데 지나인들은 ‘가우 구 리’로 발음되는 것을 쉽고 부드럽게 발음하기위해 중간 글자인 句(구)를 생략하고 ‘가우리’ 즉 지나인들의 표기로 ‘高麗(가우리)’라 했던 것이다. 이렇게 당시 지나인들은 ‘가우리高句麗’를 ‘가우리高麗’로 생략해서 불렀던 것이다. 다시말하면 우리가 高句麗를 ‘가우리’로 발음한 것이나 지나인들이 구(句)자를 빼고 高麗 두글자를 읽어도 ‘가우리’인 것이다. 이와같은 증거로 지나의 25사중 주서(周書: 영호덕분), 수서(隋書: 위징, 장손무기), 북사(北史: 이연수), 구당서(舊唐書: 유구), 신당서(新唐書: 송기, 구양수), 송사(宋史: 탈탈) 6가지 사서가 모두 고구려(高句麗: 가우리)를 고려(高麗: 가우리)로 기록하고 있다.

● Caule(가우리)가 Corea(코우뤼어)로 변천

기록에 나와있는 최초의 한국 국호(韓國國號) 라틴어(로마어) 표기는 1255년 프랑스의 선교사 뤼브뤼키(Guillaume de Rubruquis: 생사 연대 미상)로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의 친서를 가지고 몽골(원: 1271-1368, 도성은 현 하북성 북경)의 칸(汗: 왕)에게 그리스도 교도와 함께 성지 탈환을 위하여 군사를 일으키도록 권고하기 위하여 몽골을 방문하고 귀국하여 루이 9세에게 바친 보고서중에 “지나(중국)의 동쪽에 Caule(가우리)라는 나라가 있다.”고 보고한데서 시작된다. 물론 1255년 당시는 고구려(高句麗)가 아닌 왕건이 세운 고려(高麗: 935-1395, 도성은 현 요녕성 심양) 때이다.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하였고 고구려 당시도 한반도는 고구려의 영토였으며 고구려 당시 한반도 동쪽의 바다를 동해(동쪽의 바다로 방향을 나타냄)로 불렀다. 뤼브뤼키의 보고서에서 우리를 Caule(가우리)로 부른 것으로 보아 1255년 까지도 지나인들은 고려(高麗)를 ‘가우리’로 읽었던 것이 분명하다. 또한 이탈리아인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가 아버지를 따라 원(元)나라의 도성(都城) 현재의 하북성 북경(北京)에 가서 17년동안 그곳에 머물다 1292년에 고향에 돌아와 17년 간 지나 대륙의 여러나라를 여행한 내용들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진 <동방견문록: Le Livre des Mervelles>에도 우리 한국(韓國: 당시 고려)을 Cauly(가우리)로 표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Caule(Cauly)가 Corea의 시발이다. 그후 지나인들은‘高’를‘꼬우(고우)'로 발음이 바뀌고 역시 우리 한국(고려)에서도 그 무렵부터는‘高'를‘고'로 발음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지금 2012년 현재도 지나인들은‘高’를 ‘꼬우(고우)’로 발음하며 ‘麗’는 아직도‘리’로 소리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틴어(Latin) 표기 한국(韓國: 고구려, 고려) 국호는 Caule(가우리)에서 Corea(고우리, 고리)로 자연스럽게 변천된 것이 뚜렷하다. COREA를 현대영어식으로 발음하면 ‘코우뤼어’이다. 영어 앨퍼벹 ‘C’는 ‘ㅋ’으로 소리내고 앨퍼벹 ‘O’를 발음할 때는 발음기호가 ‘ou(오우)로 발음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 한글의 전신인 가명(이두어) 때문에 COREA의 국호가 생긴 것임은 어느누구도 부정할 수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서양에서는 1255년부터 우리 한국(고구려, 고려)의 국호를 라틴어 앨퍼벹의 ‘C’로 표현했다는 사실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잘못된 표현이다.

위대한 단군조선(壇君朝鮮)의 제후국들에 불과했던 춘추전국시대의 소국들 중에서 진(秦)나라의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 (BC 221)하고 세상의 모든 역사서(歷史書)를 불사르고, 학자 460명을 생 매장시킨 대사건이 있었다. 사학자들은 이것을 분서갱유(焚書坑儒)라 한다. 이때 불탄 서적이 모두 단군조선의 역사서라고해도 과언(誇言)은 아닐 것이다. 유방이 한(漢)나라를 세우고 대대적인 역사서를 편찬하기 시작했다. 이때 만들어진 것이 사마천의 <사기 史記>란 역사서이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는 황제헌원(BC 2697)부터 서한(西漢) 무제때까지 약 3,000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 만리장성의 유래

만리장성(萬里長城)의 유래(由來)는 바로 사마천의 <사기> “몽념열전 蒙 恬列傳”의 기록때문이다. “몽념열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秦己幷天下(진기병천하) “진나라가 천하를 병합하고” 及使蒙恬將 三十萬衆北遂戎狄 (급사몽념장삼십만중북수융적) “ 몽념에게 군사 30만으로 북쪽의 융적을 내쫓게 하고” 收河南 (수하남) “ 하남(河南: 황하 아래란 뜻으로 경도 110도로 갈리는 섬서성과 산서성 경계의 섬서성 북쪽 현재의 내몽고를 지나가는 황하의 남쪽을 뜻함)을 수복하였다.” 筑長城因地形用制險塞 (축장성인지형용제험색) “ 장성을 쌓아 지형과 험준함을 이용하여 요새를 만들었다.” 起臨洮至遼東延袤萬餘里(기임조지요동연무만여리)
“ 임조에서 시작하여 요동(섬서성과 산서성 경계의 황하)까지 거리가
만여리였다.” 라는 기록 때문에 만리장성이란 말이 나오게된 것이다.

● 요동과 요서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때의 요동(遼東) 요서(遼西)는 경도 110도를 기준하여 서쪽은 요서라 하고 동쪽은 요동이라했다. 다시말하면 섬서성(陝西省)과 산서성(山西省)의 경계를 이루고있는 현 황하강(黃河江)을 기준하여 요동과 요서로 나누었다는 말이다. 때문에 그당시에는 이 황하강 즉 섬서성과 산서성를 경계하면서 세로로 흐르는 황하(黃河)를 요수(遼水; 요동과 요서를 나누는 물의뜻)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진시황이 쌓았다는 만리장성은 현 감숙성(甘肅省) 임조(臨洮: 경도 103.636 위도 35.671도에 위치)에서 시작하여 요동이라고 하는 섬서성 북쪽과 황하가 만나는 곳임을 쉽게 알수있다. 직선거리 약 1,728리에 불과한 성(城)인 것이다. 감숙성 임조(臨洮)는 신라(新羅)의 최초의 도읍지(都邑地)였던 금성(金城 )이 있던 현재의 난주(蘭州) 남쪽 약 170리에 있는 지역이다.


● ‘진시황 본기’의 기록

<사기> “진시황 본기”의 장성(長城)에 관한 기록을보면, 乃使蒙恬北筑長城 而守藩籬却匈奴七百餘里 ( 내사몽념북축장성이수번리각흉노칠백여리) “ 몽념에게 북쪽에 장성을 쌓게하여 변방을 잘지키게 하고 흉노를 700여리로 물러나게 했다.” 라고 되어있다. 단지 장성(長城)이라고 했지, 만리장성(萬里長城) 이라 하지않았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있는 것처럼 진시황이 쌓은 장성이 만리나되는 거대한 장성이였다면 당연히 “진시황 본기”에 기록되어야 한다.


●장성(長城)이라 불러야

그 위대한 장성(長城)과 함께 매일같이 생활하는 중공(지나)사람들도 만리장성 (萬里長城)이라 하지않고 장성(長城) 이라한다. 지나(支那: China) 발음으로는 ‘창청’이다. 영어로는 Great Wall(그뤠잍 월)이라한다. 영어에도 만리(萬里)란 말은 없다. 이 세상에서 중공(中共)의 장성을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고 허풍떠는 민족은 우리 한국사람들 뿐이다. 자존심(自尊心)도 주체성(主體性)도 없는 사대주의적(事大主義的)인 무분별한 발상이라 본다. 만리장성이 아닌 ‘길 장(長)’에 ‘재 성(城)’을 붙여 장성(長城)이다. 그저 “길다란 성”이란 말이다. ‘만리장성’이 아니다. 이제부터라도 ‘장성(長城)’이라 불러야 한다.

우리는 동이배달한민족(東夷倍達韓民族)이다

● 인류의 발상지와 고산족

인류(人類)의 발상지(發祥地)라고 믿고있는 파미르(Pamirs) 고원을 떠나 경도(동경) 80도를 지나 동쪽인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사람들이 약 십만년(十萬年) 전부터 살았다. 경도 80도를 경계로하여 현 위그루 자치구인 신강성(新疆省)에 7439m의 천산(天山)과 현 티벹자치구인 서장성(西藏省)에는 7282m의 곤륜산이 있다. 이곳은 고산지대로 이곳때문에 고산족(高山族)이란 말이 나오게된다.

● 동이(東夷)의 정의

이들 사람들중에 한(桓; 환으로도 읽음)이란 사람은 고산족들 중 장자(長子) 즉 장손(長孫)으로 광명(光明)을 숭배한 사람으로 동쪽으로 계속 이동해와 우리가 간도(間島)라고 알고있는 흑룡강성(黑龍江省), 길림성(吉林省), 요녕성(遼寧省), 내몽고(內蒙古) 그리고 한반도에서 주로 살았다. 이때를 대략 만천년(萬千年) 전으로 본다. 그래서 이들을 동이(東夷)라고 불렀다. 동이(東夷)란 하늘(一)에서 내려온 활(弓)을 잘 다루는 사람(人)이란 뜻이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은 하늘을 근본(根本)으로한, 하늘 나라로부터 민족사(民族史)를 시작한 민족이란 뜻일 것이다.

동이(東夷)가 그토록 위대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동이는 활과 화살을 발명하고, 문화를 창조했으며, 청동기를 제작하고, 철을 제련하고 단련했으며, 배(舟)와 수레(車)를 발명하고, 농업을 발전시키고, 치수(治水; 물과 홍수를 다스림)를 하였으며, 황하 북부(黃河北部) 추운 지방의 생활로 인한 온돌 주거를 발명한 민족이다. 지금까지도 지나(支那; 많은 가지의뜻으로, 필자는 중국을 지나로 명명한다.) 인들은 동이(東夷)를 동쪽의 오랑캐라고 깔보았지만 지나대륙에서 발견된 모든 문화(文化) 문명(文明)이 동이(東夷)의 것임을 알고 더 이상 위대한 동이를 무시하지못함을 알아야한다.

● 동이배달한민족의 정의

한자(漢字)는 삼미(三味)라고해서 세가지의 맛이있다고 한다. 그첫째는 한자를 읽을수있어야하고, 둘째는 그한자의 뜻을 알때이고, 셋째는 그글자가 뜻하는 우주철학사상(宇宙哲學思想)을 알 때라고 한다. 한(桓)은 “고산족”이란뜻이고, 한(韓)은 “ 유목민”이란 뜻이며, 한(漢)은 “하천민”이란 뜻이다. 배달(倍達)이란 “도(道)를 통한 민족”이란 뜻으로 BC3898년 음력 10월3일 거발한환웅이 배달국( 倍達國)을 세운때 부터 이다.

따라서 동이배달한민족(東夷倍達韓民族)을 정의 하면, 고산족(高山族)이면서 동북아시아에서 유목민(遊牧民)으로 유목생활과 사냥을 하면서 농사를 짓고살던 장자(長子) 즉 장손으로 광명(해)를 숭배한 민족이고, 도(道)를 통한 배달(倍達) 민족으로, 동쪽으로 계속 이동해와 동쪽에 살던, 하늘(一)에서 내려온 활(弓)을 잘 다루는 사람(人)으로 지금으로 부터 약 11,000년 전부터 살고있던 민족이다.
한(韓)민족이라고 말할때는 “유목민”이란 뜻만있다. 그러나 우리민족은 고산족이며 유목민족이였으며, 위대한 동이족(東夷族)이고, 도(道)를 통한 배달민족(倍達民族)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동이배달한민족”이라고 불러야 한다.

Wednesday, January 25, 2012

슈메르 민족은 동이배달한민족의 지파다.

● 수밀이국, 우루국은 슈메르 민족이 세운 나라
원동중(元董仲)이 쓴 < 삼성기전 三聖記全> 하편의 기록을 보면, “ 파나류산 (흑룡강성 하알빈밑 완달산을 뜻함) 밑에 환인(桓因)의 나라가 있으니 천해(天海; 바이칼호수) 동쪽의 땅이다. 그 땅이 넓어, 남북이 5만리요 동서가 2만리이니 ( 필자의 생각으로는 남북이 2만리요 동서가 5만리인 것 같다.) 하나로 말하면 환국(桓國)이요 갈라서 말하면 비리국, 양운국, 구막한국, 구다천국, 일군국, 우루국(虞婁國), 객현한국, 구모액국, 매구여국, 사납아국, 선비국, 수밀이국 (須密이國) 이 합해서 12국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환국 12연방국중 ‘수밀이국’ 과 ‘ 우루국’이 슈메르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닌가 한다. 슈메르는 영어로는 쑤머(Sumer)라고 하는데, 이 슈메르민족(Sumerian)은 인류 최초의 역사(歷史)를 자신의 문자(文字)로 기록한 민족이다.

● 창조설의 시작
이라크(Iraq)에는 2개의 큰 강이 흐른다. 왼쪽으로 흐르는 강이 유프라테스강 (Euphrates River)이고, 오른쪽으로 흐르는 강이 티그리스(Tigris River )강인데, 이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에서 BC 3500 년 경에 농사를 지으며 약 500년간 존속했던 민족이 바로 슈메르민족이다. 슈메르인들은 인간이 진흙으로 만들어 졌으며, 인간은 신들(gods)에게 음식, 음료, 그리고 은신처(隱身處)를 제공하면서 신들에게 봉사하기 위한 목적(目的)으로 만들어 졌다고 믿고있었다. 또한 슈메르 민족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불멸(不滅)의 초인간(超人間)들인 신들의 집단에의해 우주(宇宙)가 인도되고(guide) 통제되고(control)있다고 믿었다. 말하자면 창조설(創造說)은 슈메르민족에서 부터 시작된 것이다.

● 슈메르인들의 신화
하늘(天; Heaven)과 땅(地;Earth)이 태고(太古)의 바다(태고해太古海; Primeval Sea)에 의해 창조(創造)된후, 공기의 신이며 인간의 신인, 아들 엔릴(Enlil)이 하늘(天)과 땅(地)을 갈라놓은 후, 어머니인 땅의 신 기(Ki)와 서로 협동하여 처음에 빛(Light)을 창조하고, 다음으로 별들을 창조하고 그리고 식물, 동물, 인간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믿고있었다. 하늘의 신인 아버지 앤(An)과 땅의 신인 어머니 기(Ki)는 모든 신들(All gods)의 부모라고 믿었다. 아버지인 하늘의 신 앤(An)과 어머니인 땅의 신 기(Ki) 사이에서 아들인 인간의신 엔릴(Enlil)이 태어났고, 엔릴은 장모인 넌바쉬그누(Nunbarshegunu)의 중매로 처녀신인 딸 닌릴(Ninlil)과 결혼 한다는 신화(神話)를 믿었다. 엔릴(Enlil)이 강(江)에서 뱃 놀이를 하다가 닌릴(Ninlil)를 강간하여 생긴 아들이 달의 신인 씬(Sin)인데, 엔릴(Enlil)의 행위가 부도덕(不道德)하다고 여겨 그도시 니뻐에서 추방당해 지옥에 빠지게 되었다는 신화를 믿었다.

● 역사는 슈메르에서 시작되고
시카고우(Chicargo)대학과 펜설붸이니어(Pensylvania)대학 교수인 쌔뮤얼 크뢔머(Samuel Kramer)가 지은 에 보면, 1889년 부터 1900년 사이에 배그댇(Baghdad: 바그다드)에서 100마일 정도 떨어진 니뻐(Nippur)라는 곳의 땅속에서 슈메르민족이 기록해둔, 진흙판에 새긴 기록들을 발굴해서 연구한 내용들로, 구약성서(舊約聖書)의 내용과 너무나도 비슷한 창조 이야기, 에덴동산 이야기, 선악과 이야기, 최초의 노아의 홍수 이야기, 죽은지 삼일만의 부활, 구세주 메시아(Messiah) 이야기, 슈메르 땅의 모든 물을 피로바꾼 이적등 인류 최초의 사건들이 기록되어있다. 유태인들이 성경을 쓰기 1,000여년 전에 이미 슈메르 민족은 그들의 글자인 쐐기문자(Cuneiform System of Writing)로 정치(政治), 경제(經濟), 사회(社會), 문화(文化)뿐만 아니라 서사시(敍事詩)등 수많은 문학작품을 남겼다.

● 두 민족간의 공통점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슈메르인은 아시아의 고산지대(高山地帶)에서 온 민족으로 우리 동이배달한민족(東夷倍達韓民族)처럼:

(1)머리가 검고

(2)후두부가 편편하며--- 민족사를 하늘나라로 부터 시작한 민족은 우리밖에없다. 그래서 하늘의 자식이라고해서 천자(天子)나 천손족(天孫族)이라한다. 우리민족은 자식을 낳아 기를때 똑바로 눕혀, 하늘을 쳐다보면서 자라게 했다. 때문에 후두부가 편편하다.

(3)신체(身體)가 적고--- 공자는 키가 9척6촌(288cm)이고, 노자는 8척8촌(264cm)이라고 한다. 지나인(支那人)들은 자고로 허풍이 세고, 사서(史書)의 기록에 거짓이 많기 때문에 믿을바는 못된다. 우리민족은 신체가 적다.

(4)슈메르민족의 설형문자(楔形文字: 쐐기문자)는 기본글자가 18글자인데 각각 7글자씩 발전시켜 모두 144자로 되어있다. 첫글자는 하늘을 본떠만들었고, 두번째 글자는 땅을 본떠 만들고, 세번째 글자는 사람을 본떠 만들어 동이배달한민족의 천(天),지(地),인(人) 삼원일체(三元一體) 우주철학사상(宇宙哲學思想)과 똑 같다.

(5)슈메르언어는 우리 한글처럼 교착어(膠着語) 이다 --- 언어를 형태론적 관점에서 분류하면, 교착어, 굴절어(屈折語), 고립어(孤立語)로 나누는데, 교착어란 어근(語根)과 접사(接辭)가 붙어서 된 글자로, ‘나’라는 어근에, ---는, ---와, ---가, ---를 처럼 접사가 변하여 된글자를 말한다. 그런데 슈메르민족의 언어는 한글처럼 교착어이다. 그밖에 교착어로는 묘족의 언어, 터키어, 미국 인디언어 등이다. 미국 인디언은 유전자로 볼때 우리 동이배달한민족과 아주 유사하다. 한국 SBS 방송국이 제작한 ‘몽고리안 루트를 가다.’에 의하면, “브리야트(Buryat: 바이칼호수 아랫쪽에 사는 부여족의 후손으로 여겨지는 지파)의 유전자를 100%로 볼때, 한국 98.91%, 곰족(울치족)98.76%, 미국인디언 98.39%이다.”

(6)태음력(太陰曆)을 사용했고 --- 슈메르민족의 창조설(創造說)에 의하면, 아버지 앤(An)과 어머니 기(Ki) 사이에서 아들 엔릴(Enlil)이 태어나고, 여자 닌릴(Ninlil)과 사이에서 아들 씬 (Sin)을 낳고 달의신인 씬(Sin)은 태양의 신인 어린애 우투(Utu)를 낳은 것으로 되어있다. 놀라운 사실은 과학자들에 의하면 태양보다 달이 먼저 생겼다는 것이다.

(7)순장(殉葬: 산채로 사람을 매장하는 것)을 하고

(8)한국인들 처럼 여자들이 머리에 짐을 이고 다녔고

(9)소가 끄는 쟁기를 사용하여 농사를 지었으며

(10) 학생들을 교육시킬때 체벌 수단으로 매(회초리)를 사용하고

(11) 학부모는 교사에게 자식을 잘봐 달라는 뜻에서 오늘날 우리 한국인들 처럼 촌지(寸志: 돈봉투)를 사용했다.

(12) 한국인의 의(衣), 식(食), 주(宙) 순서처럼 슈메르인들도 의복을 제일 중요시 했다. 민족마다 의식(意識)을 달리하여 지나인(支那人:Chinese)들은 주, 식, 의 순서이고 미국인들은 식, 주, 의 순서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지나인들은 제일의 관심사가 자신들이 살 집을 마련하는 것이며, 따라서 한 곳에 정착(定着)하여 차이나 타운(China Town)를 만들지만 한국인(韓國人: 한韓은 유목민이라는 뜻임)들은 유목민 기질이 강하여 집을 마련하여 한 곳에 정착하는데 지나인들보다 관심이 적어 보인다.

● 동이(東夷)가 인류의 뿌리
남송( 1127 – 1279)때 범엽이 지은 <후한서> ‘동이전 東夷傳’에 이런 기록이 있다.
“ 동방왈이 이자저야 東邦曰夷 夷者柢也, 동방에있는 동이들이 바로 인류의 뿌리다.” “ 언인이호생 言仁而好生, 말이 어질고 젊잖은 도덕군자다.” “만물저지이출 萬物柢地而出, 만물이 땅밑에있는 뿌리에서 자라나듯이 동이들이 만인류의 철학사상의 뿌리다.” 란 뜻이다. 슈메르문명이 서구문화(西歐文化)의 근원 이라고 역사학자들이 말하지만, 한마디로 요약하면 슈메르민족은 우리 동이배달한민족의 지파라고 생각되어진다. 우리 동이배달한민족은 동이족(東夷族)으로 장손, 즉 장자로 이어진 그리고 부계사회로 이어진 정통민족(正通民族)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는 큰집이란 뜻이다.

● 유태인들은 우리의 형제인가?
슈메르인들(Sumerians)은 쎔족(Semitic Akkadians, BC 3250 – 3000 )들에 의해 멸종 되었다. 쎔족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노아(Noah)의 맏아들 쉠(Shem)의 자손들로 유태인 민족이다. 다시말하면 유태인들이 슈메르 사람들을 죽였다는 이야기 이다. 쎔족이 슈메르민족을 멸망(滅亡)시킬때 슈메르인 남자들은 모두 죽이고, 여자들을 데리고 살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유태인들의 피속에 우리 동이배달한민족의 피가 약간이라도 흐르고 있을 것이라고 믿어진다. 그렇다. 유태인(猶太人)들은 황인종(黃人種)이며 동이배달한민족(東夷倍達韓民族)과 유사한 유전자를 가지고있다고 한다.

Monday, January 23, 2012

한글은 세종대왕이 창제한 글이 아니다

● 한글창제는 BC2181년에
지금 까지도 우리는 세종대왕(世宗大王)이 한글을 창제(創製)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것은 큰 잘못이다. 단군조선(壇君朝鮮) 제3대 가륵(嘉勒) 단군 원년인 BC 2181년 에 “을보륵”에게 명하여 가림토 38글자를 만들게했다 고 사서(史書)에 기록되어있다. 당시에는 이글을 향서(鄕書), 국서(國書), 가명(假名)등으로 불렀으며 고구려, 백제, 신라 시대를 거쳐 고려때까지 사용되어 오다가 고려(高麗)중렵때 이 글자를 “이두문(吏頭文)”이라고 고쳐 불렀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걸안족의 걸안문(契丹文) 여진족의 여진문(女眞文)도 이 “이두문”을 모방한 것이였다. 단제 신채호 선생이 지은 <조선상고사>에도 “ 진흥왕 순수비 같은 옛비에도 이두문으로 적은 시(詩)가있다.”라고 기록하고있다. 진흥왕은 신라 24대 왕으로 537에서 573년까지 36년간 왕위에 있었던 인물이다. 신라 중렵에서 고려 초까지 민간에 널리 유행한 우리나라 고유의 시가(詩歌: 시와 노래)가 있었는데, 이 시가들은 모두 향찰(鄕札)로 기록되었었다. 다시말하면 단군조선때 부르던 향서, 국서, 가명을 신라때는 향찰(鄕札)이라 불렀던 것이다. 당시 신라의 승려인 대구화상 (大矩和尙)은 신라 51대 진성왕(眞聖王; 886-896)의 명을 받아 향찰로 쓴 향가집(鄕歌集)인 “삼대목三代目”를 지었다.

● 세종대왕때는 언문, 암클이라 부르고
세종대왕( 1418 – 1450 )때는 이 이두문을 언문(諺文) 또는 “암클”이라고 불렀다. “언문”이란 “상놈의 글”이란 뜻이며 “암클”이란 여자들이 사용한 글자란 뜻으로 사대주의(事大主義)의 극치를 이룬, 당시의 우리글을 비하(卑下)하여 부르던 이름이다. <세종실록>의 기록에 “ 形而字倣古篆(형이자방고전) 형태는 옛글자를 본떠 만든 글자다.”라고 되어있고, 당시 집현전 부제학이던 “최 만리”의 상소문의 기록을 보면, “此斯諺文前朝有之 諺文皆本文字 非新字也(차사언문전조유지 언문개본문자 비신자야) 이 언문은 전조(고려조高麗朝)부터 있었던 것이며, 언문 모두로 되어있는 본 글자 (세종대왕이 창제했다는 이 글자)는 새로운 글자가 아니다.” 라고 하였다. 또한 정 인지(1396 – 1478)의 <발원문>에도 “ 글자의 모양은 옛날 전자의 모양을 본떳고 소리를 따랐다. 자음은 일곱 가락에 어울리게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한글이 창제(創製; 처음으로 만들어짐)된 것이 아님을 잘 나타내고 있다.

● 갑오개혁 후에는 국문으로 부르다
1894년 고종31년 갑오개혁(甲午開革)후 이 언문(諺文)을 국문(國文)이라고 고쳐 부르다가 1913년 주시경(1876 – 1914) 선생에 의해 “한글”이란 이름으로 불러지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한글”이라고 부르지만 현재(現在) 우리와 똑같은 글을 사용하고있는 북한에서는 “조선어 자모”라고 부르고있다.

● 한글의 역사는 4,192년
이렇게 시대(時代)에 따라 같은 글을 가림토, 향서, 국서, 가명, 향찰, 이두문, 언문, 암클, 국문, 한글등으로 다르게 불럿던 것이다. 한글이 1443년 12월에 세종대왕이 28글자를 창제했다고 믿는 것은 잘못이다. 그후 어떤 이유에서 인지 4글자는 없어지고 지금은 24글자를 사용하고있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있는 한글은 단군조선(壇君朝鮮)때인 BC 2181 년에 만들어진 글자로 4,191년(2010년현재)의 장구(長久)한 역사를 지닌 자랑스런 글자다.
이라크(Iraq)의 유프라테스강(Euphrates River)과 티그리스강(Tigris River) 사이에서 약 500년간 소가 끄는 쟁기를 사용하여 농사을 짓고 살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으킨 슈메르민족 (Sumerians)의 글자(설형문자 , 쐐기문자 혹은 Cuneiform system of writing)가 우리 한글과 기본글자의 뜻이 같다면 이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한글은 세종대왕(世宗大王)이 창제한 568년의 짧은 역사가 아니다. 1940년 7월 경북 안동에서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에 정 인지가 쓴 서문(序文)끝에 1446년 9월 상순(上旬)이라고 적혀있는 날자에 근거하여 2011년 현재 565년으로 보는 견해(見解)도 있으나 세종실록에는 1443년 12월로 되어있다. 어떤 점에서는 본래 38글자였던 것을 28글자로 세종대왕이 축소했다는 비판을 받을 만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