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February 14, 2012

한사군(漢四郡)은 있지도 않았다.

● 한사군의 유래
단군조선(壇君朝鮮)은 국초(國初)부터 진한(眞韓: 진조선), 마한(馬韓: 막조선), 변한(弁韓: 번조선), 즉 3한(韓)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진한은 단군(壇君)이 직접 통치하고 단군을 보좌하는 왕으로 변한과 마한을 두었다. 단군조선 변한(弁韓)을 연(燕)나라 도적(盜賊) 위만(衛滿)이 술수(術數)로 빼앗아 조선(朝鮮)이란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여 ‘위만조선衛滿朝鮮’이라 알려진 나라를 한(漢)나라 무제(武帝: 유철)가 위만의 손자 우거(右渠)를 멸하고 그곳 옛 번조선(변한)땅에 낙랑(樂浪), 진번(眞番), 임둔(臨屯), 현도(玄菟)를 설치했다는 설(說)이 바로 한사군 (漢四郡)이다. 사서(史書)에 등장하는 연(燕)나라는 11개로 여기서의 연(燕: BC202-BC195)은 한(漢) 나라 유방(劉邦)이 개국(開國) 공신(功臣)이던 자신의 친구 노관(盧綰)을 제후(諸侯)로 책봉한 나라를 말한다. 이 연(燕)은 주(周)나라 무왕이 자신의 동생 소공석(召公奭)을 연의 제후로 봉(封)한 그 연(燕)을 계승한 것으로 연의 도읍(都邑)은 하남성(河南省)정주(鄭州)이다.

● 조선과 연나라의 전쟁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BC770-BC233)는 단군조선 35대 사벌(沙伐) 단군 부터 47대 고열가(高列加) 단군 시기로 단군조선은 연(燕), 제(劑), 조(趙)와 끊임없는 전쟁으로 일관한다. <한단고기◦단군세기>의 기록을 보면,“35대 사벌단군 갑술 66년(BC707) 단제(壇帝)께서 조을(租乙)을 파견하여
똑바로 연나라 도성(하남성 정주)을 돌파하고 제(齊)나라 군사와 임치(臨淄)의 남쪽 교외에서 싸워 승리하였음을 알려왔다.” “36대 매륵(買勒)단군 무진 52년(BC653) 단제께서 병력을 보내 수유(須臾: 변한을 칭함)의 군대와 함께 연(燕) 나라를 정벌하였다. 이에 연나라 사람이 제나라에 위급을 알리자 제나라 사람들이 크게 일어나 고죽(孤竹: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 산서성 서남부 황하강이 꺽기는 지점으로 현, 영제시(永齊市) 일대)에 처들어왔는데 우리의 복병에 걸려서 싸워 보았지만 이기지 못하고 화해를 구하고 물러갔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변한(弁韓) 제68대 왕(王) 수한씨(水韓氏)때 연(燕)과의 전쟁에서 연나라가 패하여 변한은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를 인질(人質)로 잡았다. <위략>도 우리와 같은 기록을 하고있다.“燕有賢將秦開爲質於朝鮮(연유현장진개위질어조선) 연나라 장수 진개가 조선에 인질로 잡혀있었다.”이 사건에 대한 <사기> ’흉노전’은 약간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燕公子爲質於番韓(연공자위질어번한) 연나라 공자(?)가 번한에 인질로 잡혀있었다.” 진개라고 이름을 밝히지 않고‘공자’라고 인질의 이름을 감춘 것이다. 그 이유는 진개가 연(燕)나라 소왕(BC312-BC279) 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조선에 28년간 인질(人質)로 있던 진개(秦開)가 변한을 탈출한 후 변한(弁韓)에 처들어와 조선(朝鮮)의 서쪽변두리 천리땅을 빼앗았다. 이때부터 단군조선은 국력이 기울기 시작한다.

● 위만에게 빼앗긴 변한(弁韓: 번조선) 땅
진시황이 BC221년에 전국시대(戰國時代)를 통일하고 15년 만인 BC206년에 전국각지에서 일어난 농민 반란(反亂)에 의해 망한다. 진승, 오광, 항우, 유방등의 농민 반란에서 유방(劉邦)이 승리하여 한(漢)나라를 세우게된다. 한(漢)의 제후가 된 노관(盧綰)이 유방을 배반하고 흉노(匈奴)로 도망하자 노관의
부하인 위만(衛滿)은1천여명을 데리고 변한 왕 기준(箕準:BC243-BC194)에게 망명하니 준(準) 왕은 위만을 박사(博士)로 삼아 변한의 서쪽 땅 상하운장(上下雲障)을 맡겨 다스리게 했다. 위만은 차츰 다른 나라에서 온 망명자들로 세력을 규합하여 위만이 번조선(番朝鮮)에 망명온지 3년만에 준(準)왕에게
반기를 들고 왕위를 빼앗는다. 이부분을 사마천의 <사기>는 다음과같이 기록하고있다. “ 燕王盧綰反 入匈奴 滿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障 (연왕노관반 입흉노 만망명 취당천여인 추결만이복이동주출새 도패수 거진고공지상하장) 연왕 노관이 반란을하여 흉노로 들어가고 만(위만)은 천여 명의 무리를 모아 망명하였다. 머리를 뒤로틀어 땋은 몽치머리와 만이(오랑캐) 복장을 하고 동쪽 요새를 탈출해 패수를 건너 진(秦)나라의 옛 빈땅 상하장에서 살았다.” 망명(亡命)이란 혁명 또는 그밖의 이유로 자기 나라에 살지못하고 남의 나라로 몸을 피하는 것을 말한다. 위만(衛滿)이 망명(亡命)은 했는데 망명한 나라가 없다. 사마천(司馬遷)은 위만이 단군조선(檀君朝鮮) 변한(弁韓)으로 망명했다고 기록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소위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 한다. 과연 사마천 다운 발상이라 하겠다.

● 패수(浿水)가 청천강 ?
위만이 건넜다는 패수(浿水)는 우리가 알고있는 청천강이 아니다. 패수를 설명하기위해서 <수경주>를 인용하겠다. 지나(支那)대륙의 하천(河川) 약 120개를 자세히 설명해놓은 고대(古代) 지리서로 <수경주水經註>가 있다. <수경주> ‘13주지’에 의하면, 浿水縣在樂浪東北 鏤方縣在郡東 蓋出其縣南逕鏤方也 昔燕人衛滿 自浿水西至朝鮮(패수현재낙랑동북 루방현재군동 개추기현남경루방야 석연인위만 자패수서지조선)“패수현은 낙랑의 동북에있고, 루방현은 낙랑군의 동쪽에있다. 패수가 그 남쪽에서 나와
루방을 지난다. 옛 연나라 사람 위만이 패수 서쪽에있는 조선까지 갔다.”戰國時 滿乃王之 都王險城 地方數千裏 其地今高句麗之國治(전국시 만내왕지 도왕험성 지방수천리 기지금고구려지국치) “전국시대에 위만이 왕으로 왕험성(단군왕검의 왕검성)에 도읍했으며 땅이 수천리였다. 그 땅은 지금 고구려가 다스리는 땅이다.” 이상은 <수경주>에서 간추린 내용이다. <한서지리지> ‘낙랑군樂浪郡’의 기록을 보면, 한(漢) 무제때 설치한 것으로 유주(幽州)에 속한다고 되어있다. 낙랑군에 속하는 지명들로 조선(朝鮮), 패수(浿水), 대방(帶方), 장령, 돈유, 루방(鏤方), 해명(海冥), 소명(昭明)등이 있다.
그밖에 유주에 속하는 군(郡)으로 대군(代郡), 상곡군(上谷郡), 어양군(漁陽郡), 우북평(右北平郡), 요서군(遼西郡),요동군(遼東郡), 현도군(玄菟郡)이있다. 또다른 사서로 <금사> ‘지리지’을 인용하면, “有太行陘 太行山 黃河 沁水 浿水(유태행형 태행산 황하 심수 패수) 태행단층이 있고 태행산, 황하, 심수, 패수(浿水)가있다.” “鎭四 武德 柏鄕 萬善 淸化(진사무덕 백향 만선 청화) 진사 무덕, 백향, 만선, 청화등 4진을 두었다.” “修武有濁鹿城(수무유탁록성) 수무현(황하북부 하남성)에 탁록성(濁鹿城)이 있다.”興定四年以修武縣重泉村爲山陽縣 隷輝州(흥정사년이수무현중천촌위산양현 례휘주)“흥정 4년에 수무현 중천촌을 산양현으로 바꿔 휘주에 속하게했다.” 武陟有太行山 天門山 黃河 沁水 鎭一宋郭(무척유태행산 천문산 황하 심수 진일송곽) “무척현에 태행산(太行山)이 있고 천문산, 황하, 심수(沁水), 송곽진이 있다.” <수경주>, <한서지리지>, <금사 ◦ 지리지>에서 언급된 이름들은 모두 산서성(山西省) 남부와 황하(黃河) 북부 하남성(河南省)에 있는 지명(地名)들이다.
따라서 패수(浿水)는 황하북부 하남성에 있는 강(江)으로 제수(濟水), 취수(溴水)라고도 했고 고려때는 패강(浿江)이라고 했으며 현, 지나대륙지도에는 망하(蟒河) 라고 되어있는 하천(河川)인 것이다. 패수(浿水)는 우리 동이배달한민족사(東夷倍達 韓民族史)의 강역을 찿는데 가장 중요한 지명인 것이다.

● 자중지난으로 망한 위만조선
연(燕)나라 도적 위만(衛滿) 이 번조선(변한)을 BC194년에 강탈(强奪)하여 그의 손자 우거(右渠)때인 BC108년에 한(漢)무제에 망함으로 위만조선은 86간 지속 되었던 나라다. 약 1년간 한무제(漢武帝)의 육군 5만, 수군 7천과 싸운 우거(右渠)와의 전쟁은 무제의 완전한 패전(敗戰)이였다. 자중지난(自中之亂), 우거 정권 내부의 분열로 우거의 신하들이 우거를 살해하고 한(漢)나라에 항복했기 때문에
전쟁이 쉽게 끝날 수 있었다. 수륙 총사령관인 한(漢)나라 순체(荀彘 )가 계속 공격하자 우거 진영에서는 결사항전파(決死抗戰派) 와 주화파(主和派)로 갈린다. 우거(右渠)의 아들을 포함한 많은 신하들은 주화파였고 우거와 성이(成已) 장군등은 결사항전을 주장한다. 지금의 장관급 벼슬에 있던 로인(路人), 한음(韓陰), 니계상 (尼谿相) 삼(參), 장군 왕겹(王唊)등이 모두 도망해 한(漢)나라에 항복하고,
삼(參) 은 자객을 보내 우거(右渠)를 살해한다. 왕이 살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이(成已) 장군은 도성인 왕검성(王儉城)을 끝까지 지킨다. 또 다른 내부 반역자인 우거의 아들 장강(長降)과 최(最)의 간계(奸計)로 성이 장군이 죽어 결국 전쟁은 끝이난다. <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 左將軍使右渠子長降 相路人之子最告諭其民 誅成己 以故遂定朝鮮 爲四郡 封參爲澅淸侯 陰爲荻苴侯 唊爲平州侯 長降爲幾侯
最以父死頗有功 爲溫陽侯 (좌장군사우거자장강 상로인지자최고투기민 주성기 이고수정조선 위사군 봉삼위홰청후 음위적저후 겹위평저후 장강위기후 최이부 사파유공 위온양후) 좌장군이 우거의 아들 장강을 시키고 상로인의 아들 최가 사람들을 꾀어 성기를 죽였다. 이로써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여 사군으로 했다. 삼을 봉하여 홰청후로 삼고, 음을 적저후로, 겹을 평주후로, 장강을 기후로삼는다. 최는 아비의 죽음에 공이 큼으로 온양후로 삼는다.” 사마천의 <사기>에 4군(郡)이라 했지만 사실은 5군이며, 그 5군(郡)에 봉(封)해진 제후(諸侯)들은 한(漢) 나라 사람들이 아니고 모두 반역(反逆)에 가담한 위만조선 우거(右渠)의 신하들 이다. 여기 <사기>에 기록된바와 같이 한무제(漢武帝)가 위만조선(衛滿朝鮮)를
멸(滅) 하고 번조선(변한)땅에 사군(四郡)을 두었다고 했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있는 한사군(漢四郡)인 낙랑, 진번, 임둔, 현도를 설치한 것이 아니다. 한오군(漢五郡)으로 다섯 제후(諸侯)를 임명한 것이다.그러나 먼 훗날 반고(班固)가 쓴 <한서漢書> ‘서남이 양월 조선전’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故遂定朝鮮爲眞番, 臨屯, 樂浪, 玄菟四郡 (고수정 조선위진번, 임둔, 낙랑, 현도사군) 마침내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 임둔, 낙랑, 현도 사군을 두었다.”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에 없던 낙랑(樂浪), 진번(眞番), 임둔(臨屯), 현도(玄菟)가 약 180년이 지난후 반고에 의해서 한사군(漢四郡)이 조작(造作)된 것이다. 이후부터 다른 사서(史書)들도 한결같이 한 무제(武帝)가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멸하고 그곳에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한 것으로 각색(脚色)되어 왔다. 특히 일제와 식민사학자들은 위만(衛滿)이 지나(支那) 사람으로 우리가 지나의 지배를 받았다고 가르쳤다. 한사군(漢四郡)은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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