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February 23, 2012

신라(新羅)는 한반도(韓半島)에 있지않았다. 제1부

역사(歷史)의 3대 요소(要素)를 사람, 장소, 시간이라 한다. 우리 동이배달 한민족(東夷倍達韓民族) 처럼 지나(支那) 대륙의 광활한 영토(領土)를 빼앗기고 한반도(韓半島)로 쫒겨온 민족사(民族史)의 경우에는 그 당시의 영토, 즉 강역 (疆域: 국경)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정확하게 밝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금으로부터 약 4,300년 전의 단군조선(壇君朝鮮)때 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 대진국(발해), 고려때까지 사서(史書)에 자주 나타난 지명들인 영주(營州)를 경상 북도 영주군이라하고 패수(浿水)는 대동강의 옛 이름이며 살수(薩水)는 청천강, 평양성(平壤城)은 한반도 평안남도 평양이라하는등 망발(妄發)을 서슴치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고증 (考證)이나 연구(硏究) 없이 일제하에서 배운 엉터리 역사(歷史)를 앵무새 처럼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 신라 시조(始祖)는 김씨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 시조 혁거세 거서간’의 기록에, “돌산고허촌장 (突山高墟村長) 소벌공(蘇伐公)이 양산(楊山) 기슭 나정(蘿井: 우물) 옆에 있는 숲사이에 말(馬)이 무릎을 꿇고 울고있어 가보니 갑자기 말은 볼 수 없고 다만 커다란 알(卵) 하나만 있었다. 그것을 깨어보니 갓난아이가 나왔다. 데려다 길렀는데 여남은 살이되자 기골이 준수하고 숙성하였다. 6부 사람들은 그 출생이 신기하고 이상했으므로 그를 높이 받들고 존경했다. 이때 그를 세워서 임금으로 삼았다. 진한(辰韓) 사람들은 표주박을 박(朴)이라 했는데 처음에 큰알이 표주박과 같았으므로 박으로 성을 삼았다. 거서간(居西干)은 진한에서는 임금을 말한다. 혹은 귀한 사람을 부르는 칭호라고도 한다.”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쓴 김 부식도, “신라의 박씨, 석씨는 모두 알에서 나왔고 김씨는 황금 궤(상자) 속에 들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며, 혹은 황금수레를 타고 왔다고 하니 이는 너무 기괴 (奇怪)하여 믿을 수 없으나 세속이 서로 전하여 사실이라 한다.”라고 논평하여 김 부식(金富軾) 자신도 신라(新羅) 시조 혁거세에 ‘박(朴)’씨를 하사 (?) 하여 박혁거세(朴赫居世)로 만들었지만 그의 난생신화 (卵生神話: 알에서 태어났다는 신화)에 의구심을 가졌다.
2008년 KBS 역사 스페셜(Special)에서 흉노 휴도왕(休屠王)의 태자(太子) 김일제(金日磾: BC 134-BC86)가 신라 김씨의 조상이라 소개하면서 근거로 신라 30대 ‘문무대왕릉비’와 1954년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에서 발굴된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을 소개했다. <대당고김씨부인묘명>의 기록에, “ 태상천자(太上天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하고 집안을 열어 드러내셨 으니 이름하여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로 이분이 곧 우리가 받은 성씨(姓氏)인 김씨의 시조(始祖)이다. 먼 조상의 이름은 김 일제이시고 흉노 조정(朝廷)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西漢)에 투항하여 무제(武帝)아래서 벼슬 하였으며 그후 7대에 걸쳐 벼슬하였다. 한(漢)나라에 난리가 나서 난을 피해 멀리 피난 하였다. 우리 집안은 요동(遼東)에 숨어 살게되었다.”라고 되어있다. 또한 문무왕(文武王)비문에는 문무왕의 조상은 “투후로 7대를 이어 하늘에 제사지내고… 15대조인 성한왕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신라김씨 (新羅金氏)의 시조(始祖)는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BC 2578-BC 2494)이고 중시조(中始祖: 쇠퇴한 가문을 중흥시킨 조상)는 김 일제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신라 시조(始祖)의 왕호(王號)가 거서간(居西干)인데 거서간(居西干)의 뜻은 “서쪽에서 살다온 왕”으로 서쪽에 있던 한(漢)나라에서 난을 피해 요동(遼東)으로 왔다는 본문의 기록과 일치한다. 따라서 신라의 시조(始祖)는 ‘박’씨가 아니라 ‘김’씨로 보아야 한다.

● 왕망(王莽)은 김 일제의 증손자?
“한(漢)나라에 난리(亂離)가 나서 난을 피해 요동(遼東)에 숨어 살게되었다.” 라고한 한(漢)나라 난리는 왕망(王莽)이 세운 신(新: AD8-AD23) 나라가 망(亡)하고 유수(劉秀: 광무제)가 후한(後漢)을 세우는 과정에서 일어난 난리를 뜻한 것으로 보여진다. 왕망(王莽: BC45-AD23)이 전한(前漢: BC202-AD8)을 멸망시키고 신(新)이란 나라를 세워 15년간 대륙을 지배하지만 지나(支那) 정사(正史)인 25사에 들지도 못할 뿐더러 ‘왕망 열전’ 정도로 사서에 기록되어 황제(皇帝)다운 대우를 받지못하고 있다. 15년이란 짧은 기간중 왕망은 많은 개혁정책을 폈는데 특히 그는 수 많은 지명(地名)들을 개칭(改稱)한 사람이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반고(班固)가 쓴 <한서漢書> ‘곽광 김 일제전’의 기록이다. “ 當母南卽莽母功顯君同産弟也(당모남즉망모공현군동산제야) 당(김당)의 어머니 는 남(남대부인)인데 곧 망(왕망)의 어머니이고 공이 현저한 자로 친동생 이다.” 라고 되어있어 김 일제(金日磾)의 증손자인 김당(金當)의 어머니가 왕망(王莽)의 어머니로 김당과 왕망이 형제지간으로 되어있다. 말하자면 왕망은 김 일제의 증손자로 왕(王)씨가 아니고 김(金)씨란 말이 되는 것이다. 왕망이 신도후 (新都侯) 에 봉해졌기 때문에 신도후의 신(新)자를 따서 신(新)나라를 세웠다고 해석 할 수도 있지만 1,000년 사직(社稷)의 신라(新羅)가 왜 서나벌, 사라, 사로, 계림등의 국호를 버리고 신(新)자를 택하여 신라(新羅)라고 했는지 우리 후손들이 알지못한 비밀이 숨겨져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 요동(遼東)은 황하 동쪽
원래 요동(遼東) 요서(遼西)는 경도(동경) 110도를 기준하여 서쪽을 요서라하고 동쪽을 요동이라 했다. 섬서성(陝西省)과 산서성(山西省)의 경계를 이루고있는 현재의 황하강(黃河江: 당시 요수遼水)을 기준하여 요동과 요서로 불렀다. 반고(班固)가 쓴 <한서漢書> ‘지리지’에, 요동군(遼東郡)은 유주(幽州)에 속한 지역으로 양평(壤平), 신창(新昌), 무려(無慮), 망평(望平), 요양(遼陽), 험독(險瀆), 거취(居就), 안시(安市), 무차(武次), 서안평(西安平)등이라 되어있다. 이곳이 바로 단군왕검(壇君王儉)과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이 있던 현 산서성을 말한다. 산서성은 동이배달한민족 (東夷倍達韓民族)의 중원(中原: 역사 문화의 발원지) 으로 단군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대진(발해), 고려의 핵심 영토였다. 본문에서 “한(漢)나라에 난리가 나서 난을 피해 요동 (遼東)에 숨어살았다.”는 요동이 바로 산서성 임분시(臨汾市)를 뜻하는 것이다. 한(漢) 나라의 도성(都城)인 서안(西安) 에서 산서성으로 몸을 피신한 것이다. 평양성(平壤城)을 지나 남쪽으로 흘러 내려가는 강(江)을 고구려때는 압록수(鴨綠水)라고 불렀고 다른 이름으로는 마자수, 당취수, 대요수, 그리고 고려(高麗)때는 안민강(安民江)이라고도 불렀으며 현재는 분수(汾水) 혹은 분하(汾河)라고 부르고있다. 당(唐)나라가 요동을 정벌한다는 “요동遼東”은 당시 산서성(山西省)에 있던 평양성 (平壤城)에 도읍(都邑)한 고구려(高句麗)를 뜻한 것이다.

● 단군조선 유민(流民)들이 세운 신라
<삼국사기> ‘신라 본기 제1, 혁거세 거서간(赫居世居西干)’편을 보면, “ 전한(前漢) 효선제(孝宣帝) 오봉원년 (BC 57) 갑자 4월 병진에 왕위에 오르니 왕호(王號)는 거서간(居西干: 서쪽에서 살다온 왕이란뜻)이였다. 그때 나이는 13세였다. 국호를 서나벌 (徐那伐) 이라 했다.” 이보다 앞서 조선(朝鮮: 단군 조선)의 유민(流民)들이 여러 산골짜기에 흩어져 살면서 여섯마을을 이루고 있었는데 첫째 알천 양산촌, 둘째 돌산 고허촌, 셋째 취산 진지촌, 넷째 무산 대수촌, 다섯째 금산 가리촌, 여섯째 명활산 고야촌으로 이 여섯 마을은 경도 110도 (산서성과 섬서성의 경계인 황하로 당시의 요수遼水)를 경계로하여 산서성 서쪽인 섬서성(陝西省), 감숙성(甘肅省), 청해성(靑海省), 사천성(四川省), 신강성(新疆省) 동쪽 일부로 비정(批正)한다.
그 근거로 <산해경>을 인용하면,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 天毒 其人水居偎人愛之(동해지내 북해지우 유국명왈조선 천독 기인수거 외인애지) “동해(산동성과 하남성 경계에 있던 천연호수로 당시에는 동해, 발해, 거야택, 대야택임)안의 북해( 산서성 서남 최남단에 있는 운성염지로 당시에는 북해 또는 창해라고 부른 곳이며 2009년 현지 이름으로는 해지解池임) 모퉁이에 나라가 있는데 이름하여 조선이다. 조선(朝鮮)을 천독(天毒)이라하며 그 사람들은 물이있는 곳에서 살고 사람을 가까이하고 사랑한다.” 여기서 ‘북해 모퉁이’라고 한것은 이곳 산서성이 단군조선(壇君朝鮮)의 영토이자 왕검단군(王儉壇君)의 왕검성( 고구려때의 요동성인 현 산서성 단곡)이 북해(北海)와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천독(天毒: 하늘의 독을 가지고있는 무서운 사람)은 천축국 (天竺國)이며 도덕(道德)을 귀중하게 생각하고, 문서(文書: 많은 역사와 글)를 가지고있으며 금,은(金,銀)과 돈을 가지고 나라 가운데서(단군조선에서) 죽음을 무릎쓰고 떠나갔다”라고 <산해경>을 쓴 곽박(郭璞)이 주해(註解)를 한것이다. 천축국 (天竺國)은 동,서,남,북, 중앙으로 5천축국이 있었는데 중천축국에서 석가모니가 출생한 것으로 되어있다. 단군조선(壇君朝鮮)의 진한(辰韓: 진조선)이 BC200 년경에 흉노족 모돈(冒頓)에게 망하고 변한(弁韓: 번조선)이 위만에게 BC 194 년경에 망하자 많은 단군조선의 유민(流民)들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피난을 가서 신강성(新疆省), 청해성(靑海省), 감숙성(甘肅省), 서장성(西藏省)일대에
5천축국을 세우게된다. 따라서 최초의 신라가 건국될 때 여섯 마을이라고 한 지명 위치는 모두 지나(支那) 대륙의 서쪽 지방 즉, 경도 110도로 갈리는 황하강(黃河江)
서쪽 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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