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pril 1, 2012

단군조선(壇君朝鮮)이 신화(神話) ? 제2부

● 현 요하(遼河)는 916년부터 만들어진 지명

거란족 야율아보기가 현재의 내몽고 자치구에 있는 파림좌기(巴林左旗)에 도읍을 정하고 요(遼: 916-1125)나라를 세움으로서 이곳의 하천을 요하(遼河)라고 부르게 된다. 요나라를 세우기 이전의 요하는 하남성과 산서성 혹은 섬서성과 산서성 사이의 황하(黃河)를 요하나 요수(遼水)로 불렀다.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공 할 때의 요수, 요하는 위에서 언급한 황하를 지칭함을 분명히 밝힌다. 고구려가 망하고 248년후에 요나라에 의해 새로 생긴 요하(遼河) 때문에 한국의 재야사학자들도 이에 속아 수(隋)와 당(唐)이 마치 이곳 요녕성까지 처들어 온 것으로 잘못 알고있는 것이다.

현재의 요하는 요녕성 서북부 내몽고 자치구의 노합하(老哈河)와 서랍륜하(西拉倫河)를 뜻한다. 홍산문화가 발견된 지역은 노합하의 상류에 있는 적봉시(赤峰市)의 동북에 위치한 홍산(紅山: 붉은 산을 의미)으로 단군조선(壇君朝鮮: BC2333-BC237)의 5경(五京: 다섯 곳의 도읍지)의 한 곳으로 <삼국유사>에서 말한 무엽산(無葉山)으로 보이는 곳이다.

요(遼)나라의 도읍지인 파림좌기 남쪽 약 441리에 위치한 산이다. 홍산은 붉은 산으로 철 성분이 많은 바위 산이기 때문에 나무가 자라지 않는다. 나무가 자라지 않으니 나무 잎은 존재 할 수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무엽산(無葉山: 나무 잎이 없는 산)이라 했던 것으로 보인다.

● 역사 말살이 곧 그 민족의 말살

지나의 역사에도 신화가 있고, 단군조선의 기록에도 신화가 있는데, 왜 지나의 신화는 문제가 되지않고 단군왕검의 출생(出生) 신화만이 문제가 되어, 단군조선(壇君朝鮮)의 역사가 송두리째 부정되고, 매도되고, 말살되어야 한단 말인가?

역사학자 토인비는 “ 한 민족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그 민족의 역사를 말살(抹殺)하는 것이 식민제국주의자들의 철학이다.”라고 했다. 일본X들이 우리민족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2,096년의 찬란한, 실존(實存)했던 단군조선을 신화로 둔갑시켜 매장(埋藏)시켰다.

특히 일본인 이마니 시류(今西龍: 1875-1932)가 식민사학을 주도했고, 그의 제자였던 반민족 사학자 이병도와 지금 이 시간에도 한국의 대학 강단에서 식민사학(植民史學)을 가르치고있는 민족반역자들이 공범자들이며, 단군조선의 역사의 실체를 두려워하는 일부 기독교인들 때문에 단군조선의 역사가 신화(神話)로 된 것이다.

● 단군조선은 실존했던 나라

단군조선은 신화가 아닌 실존했던 나라이다. 단군왕검( 왕검은 이두어이고, 왕검을 환검桓儉이라고도함)은 BC 2370년 5월 2일 인시( 새벽 3시 - 5시사이)에 태어났으며,아버지는 배달국 (倍達國)의 18대 거불단환웅(居弗檀桓雄)이다. 왕검은 14세때 비왕( 왕을 보좌하는 왕)이 되어 24년간 있다가, 무진년인 BC 2333년에 아사달(阿斯達: 이두어로 새로운 땅 혹은 새로운 산이란 뜻으로, 필자는 현 산서성山西省 태원太原으로 비정한다.)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비왕으로 24년간, 단군으로 93년간, 130세까지 살았다. 단군조선(壇君朝鮮)은 지나의 왕조인 요(堯), 순(舜), 하(夏), 은(殷), 주(周)의 상국(上國)으로 조공을 받았으며 왕조가 바귈때마다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음을 여러 사서에서 볼 수 있다. 단군조선(壇君朝鮮)은 1대 왕검(일명 환검)부터 47대 고열가 단군까지 2,096년간의 장구(長久)한 역사를 누린 어느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실존(實存)했던 국가이다.

암울한 시대를 만나 식민사학자(植民史學者)란 오명(汚名)을 갖게 되었던 이병도 선생도 작고(作故)하기 전에는 “ 단군(壇君)은 신화(神話)가 아닌 우리 국조(國祖)다.” 라고 했다하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단군(壇君)이 국조가 아니라 왕검(王儉: 환검桓儉)이 국조라 했더라면 더 휼륭했었을 것이다. 단군이란 고천제(告天祭: 하늘에 제사지냄)를 지낼 때 주인(主人)이자 천자(天子)란 직책이지 사람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단군조선 때의 단군(壇君)은 한분이 아니고 모두 47분이였다. 현재의 대통령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으로 보인다.

Sunday, March 18, 2012

단군조선(壇君朝鮮)이 신화(神話)? 제1부

● 모계사회(母系社會)의 신화들

태호복희씨(BC 3512)의 어머니는 신모(神母)인데 무지개가 둘러싸, 무지개의 감응(感應)을 받아 잉태하여 복희씨를 낳았다고 사서에 기록되어있다. 마치 동정녀인 처녀가 애를 낳았다는것과 무엇이 다른가! 분명히 신화(神話)다.

염제신농씨(BC 3071)의 어머니는 여등인데 용(龍)과 관계하여 염제신농씨를 낳았다고한다. 요즘 같으면 유치원생들도 믿지 않을일 이다. 이것 역시 신화이다.

소호금천씨(BC 2578)의 어머니는 황아(皇娥)인데, 궁상(窮桑)이라는 들판에서 놀고있는데, 자신이 백제(白帝)의 아들이라 일컫는 신동(神童)과 교합하여 소호금천씨를 낳았다고 한다. 신동이란 재주와 슬기가 남달리 뛰어난 아이란 뜻이다. 말하자면 미성년자인 어린애하고 관계하여 소호를 낳았다는 말이다. 어린애에 대한 이상성욕자를 페더파일(pedophile)이라고 하는데 요즘같으면 징역 5년정도 받을 수 있는 대 사건이다. 이것 또한 분명한 신화인 것이다.

제곡고신의 어머니는 간적이란 여자인데, 제비알을 삼키고 임신이 되어서 제곡고신을 낳았다고 한다. 얼마나 허무맹랑한 이야기인가! 분명히 신화이다. 그런데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영국사람들이 ‘제비’와 ‘삼키다’라는 영어 단어를 만들때 이 제곡고신(帝곡高辛)의 신화에서 영감을 받은듯 하다. 제비를 swallow라 하고, 삼키다란 단어도 swallow이다. 말하자면 Ganjeok swallowed an egg of swallow. ( 간적이 제비 알을 삼켰다.) 이다.

요임금은 임신한지 14개월만에 낳았다고 한다. 7개월이나 8개월에 나왔다는 칠삭둥이, 팔삭둥이란 말은 들어보았어도 14개월만에 애를 낳았다는 것은 처음이다. 신화이다. 주(周)나라를 세운 후직의 어머니는 강원이란 사람인데, 길을 걸어 가다가 거인의 발자취를 밟고 갔더니, 애를 배어서 후직을 낳았다고 기록되어있다. 분명히 신화이다.

한(漢)나라를 세운 유방의 어머니는 큰 연못에서 용(龍)과 교합하여 유방을 낳았다. 다시말하면 한나라 유방은 사람 자식이 아니고 용X끼인 것이다. 유방(劉邦)의 탄생 역시 신화(神話)로 기록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대로 지나(支那: 많은 가지의뜻으로 중국의 옛이름)인들이 자신의 조상들이라고 주장하는 태호복희, 염제신농, 소호금천, 제곡고신, 요임금, 후직, 그리고 한나라 유방의 탄생이 모두 신화이다.

동양(東洋)은 말할것도 없고 서양(西洋)의 역사도 신화로 기록된 부분이 많다. 역사(歷史)란 사실을 기록한 것이고, 신화(神話)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다. 역사가 형이하학( physical)이라면, 신화는 형이상학( metaphysical)의 기록이다.

한 나라의 제왕(帝王)이 나타날 때는 이 제왕은 보통 사람과는 다른점이 있다. 그런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신화를 사용 한 것이다. 지나(支那)쪽의 신화와 단군조선의 신화를 잘 비교, 검토해보면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태호복희씨, 염제신농씨, 소호금천씨, 제곡고신, 후직, 유방등의 출생 신화에서는 아버지가 없고, 어머니만 언급(言及) 되어있다. 이것이 시사(示唆)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바로 모계사회(母系社會: matrilineal society)를 뜻한다.

옛날에는 부족(部族)들을 동물의 이름으로 대신했다. 예를들면, 염제신농씨나 치우천황같은 분은 호랑이족 으로, 태호복희씨는 백사(흰뱀)족으로, 소호금천씨는 독수리족, 황제헌원은 곰족으로 표현했다.
지금의 백마부대, 청룡부대, 맹호부대 식으로 군대 사단을 지칭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백마부대에서 전역한 사람을 백마(白馬: 흰말)라고 할 사람은 없다.

● 왕검단군 출생은 부계사회

단군왕검(壇君王儉)의 출생 신화에서 곰과 호랑이가 한굴속에 살고 있었다는 말은, 곰족의 여자와 호랑이족의 여자가 한마을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은유적(隱喩的) 으로 나타낸 것이며. 쑥과 마늘을 등장시킨 것은 그 당시 사회규범(社會規範)등을 나타낸 것일 것이다.

수 천년의 모계사회를 부계사회로 전환하는 일은 쉬운일이 아닌 대 혁명이였다. 단군왕검의 출생을 신화(神話)로 표현하므로서 부계사회(父系社會: patrilineal society)를 표방하고 나타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4,500년전이 모계사회였고, 그당시 곰족이 많이 살았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고고학적인 유물발굴이 있었다.

이름하여 홍산문화(紅山文化)라고 하는데, 1906년 일본인 도리이류조(鳥居龍藏)가 요동지방 지표조사를 하던중 요하지역 (遼河地域: 요녕성 서북 현 내몽고 자치구)에서 신석기시대 유물(遺物)과 적석묘( 積石墓: 돌로만든 무덤)를 발견했다. 1955년 이를 홍산문화라 이름하고, 계속 발굴조사중, 1982년 요녕성(遼寧省) 우하량(牛河梁)에서도 같은 유물이 많이 발굴되어 세상을 놀라게하고 있다. 세계 4대 문명 발상지로 황하, 인더스, 이집트, 메소포타미아라고 한다.

황하 문명(黃河文明)이 주변 아시아의 모든 문명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배웠고 그렇게 알고있으나, 이 홍산문화의 유물 발굴로 인하여, 우리 선조였던 환웅천황의 배달국(倍達國)과 단군조선의 땅인 이곳에서 발굴된 동이족(東夷族)의 문화인 홍산문화가 황하문명 즉 앙소문화보다 1,500년이 앞선 문화임이 밝혀졌다. 이 유물들에서 볼 수있는 것처럼, 수많은 웅녀 곰조각상이 나왔고, 요녕성 우하량에서 발굴된 것은 “여왕국”이라한다. 당시의 모계사회와 곰족이라는 사람들이 살고있었다는 사실을 고고학적으로입증한 것이다.

Wednesday, March 7, 2012

중국이 아니라 지나(支那)로 불러야

경도(동경) 80도를 기준하여 오른편 동쪽인, 동북아시아라고 하는 외몽고, 내몽고 동쪽, 흑룡강성(黑龍江省), 길림성(吉林省), 연해주, 요녕성(遼寧省), 하북성 북경근처, 그리고 한반도에서 한족(桓族) 일명 고산족(高山族)들이 사냥을 하고 유목생활을 하며 농사를 짓고 살던것이 우리 조상의 시발(始發)이다. 한(桓)은 고산족을 뜻하고, 한(韓)은 유목민을 뜻하며, 동쪽에 살던 사람을 동이(東夷) 라고하고, 도(道)를 통한 것을 배달(倍達)이라하여 우리민족을 동이배달한민족 (東夷倍達韓民族)이라고 부른다.

● 신석기시대 인류의 이동
사람들이 동북아시아에서 최초로 유목생활(遊牧生活)과 사냥을 했다는 증거로 그동안 발견된 빗살무늬 토기 분포지역을 잘 관찰해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빗살무늬 토기는 유목민(遊牧民)들이 사용하던 토기(土器)로 토기 밑부분이 뾰쭉하면서 둥그럽게 된 모양의 토기를 말한다. 빗살무늬 토기가 발견된 지역은 한반도인 수양개, 연해주지역, 바이칼호수 근처, 알타이산맥 근처, 연해주동쪽 일본열도인 홋가이도, 그리고 캄차카로, 북동아시아에만 한정(限定)되어있다. 황하(黃河)의 이남(以南)에서는 빗살무늬 토기가 발견된바 없다. 또한 1987년에 한반도 남해에서 약 6,000년경의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 인골(人骨)이 발견된바 있고, 하북성(河北省) 북경지역에서 약 10만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推定)되는 하토원인(河토原人)의 인골이 발견되었으며, 1988년에는 바이칼 호수 아랫쪽에서 약 7,000년 이상의 포파노바 인골이 발견되었다. 1944년에는 알타이산맥 남단에서 약 1만년 전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냥도구인 흑요석이 발견되었다. 사람들이 처음에는 아시아 북.동쪽 즉 동북 아시아에서 살았으나, 인구가 증가하자 점차 황하강 근처로 이동하게된 것이다.

● 지나와 한민족의 관계
지나인(支那人)들은 자신들의 조상을 3황(皇)( 태호복희, 염제신농, 황제헌원) 5제(帝)( 소호금천, 전욱고양, 제곡고신, 요, 순)에서 찿는다. 그들은 8명의 조상에서 갈라져나간 계보를 가지고있다. 우리 동이배달한민족은 한국(桓國: BC 8936), 배달국(倍達國: BC 3898), 단군조선 (壇君朝鮮: BC 2333)으로 이어진 장자(長子), 장손으로 부계(父系)인 적자(嫡子)로 이어진 민족사(民族史)를 가지고 있는 반면, 지나는 우리의 방계(傍系: 직계에서 갈라져나간 계통)나 서출(庶出: 첩의 소생)로 모계(母系)로 이어진 나라이다. <산해경>의 기록을 보면, 大荒之中有山名曰不咸 肅愼之國在白民國 北有樹曰 雄常先八代帝 於此取之(대황지중유산명왈불함 숙신지국재백민국 북유수왈웅상 선8대제 어차취지) “ 크게 거친땅(만주) 가운데 산이있으니 이름하여 불함산 (백두산)이다. 숙신국(단군조선)에있다. 백민국( 백의민족으로 장자이고 동이족중 제일 으뜸임)의 나라에 있으며, 북쪽에 나무가 있는데, 이름하여 웅상이라한다.
팔대제(3황5제)가 여기서 이 웅상의 나무를 취하였다.” 웅상(雄常)의 나무를 취하였다는 말은 제도(制度)나 문물(文物)뿐만 아니라 민족의 뿌리가 동이배달 한민족에게서 비롯됐다는 뜻이다.
지나의 왕조는 모두 외자로 되어있다. 요, 순, 하, 은(상), 주, 노, 위, 정, 진(秦), 조, 체, 연, 송, 제, 진(晉), 초, 진(陳),한, 수, 당, 송, 요, 금, 원, 명, 청 모두 한 글자로된 이름이다. 반면에 우리는 한국(정통국), 배달국, 단군조선, 진한, 변한, 마한, 북부여, 동부여, 남부여, 졸본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대진국(발해), 고려로 반드시 2글자 이상으로 되어있다. 외자인 국호(國號)는 우리 동이배달한민족의 제후국임을 암시한다. 사실상 요, 순, 은(상), 주는 단군조선(壇君朝鮮)의 제후국으로 단군조선에 조공(朝貢: 종주국에게 속국이 예물을 바침)한 기록이 사서에 있다.

● ‘중국’이란 이름의 등장
중국(中國)이란 이름을 지어준 사람은 단군조선 제 12대 아한단군(阿漢壇君: BC 1834)때 국태사(國太師)로 있던 유위자(有爲子)이다. 공자(孔子)의 7대손인 공빈(孔斌)이 쓴 <동이열전>의 기록을 인용하면, 有爲子以天生聖人 英名洋溢乎中國 伊尹受業於門(유위자 이천생성인 영명양일호중국 이윤수업어문) “ 유위자는 하늘이 낸 성인이며 그에게서 넓고 뛰어나게 좋은 중국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이윤이 그의 문하에서 배웠다.” 라고 되었있다. 여기서 이윤(伊尹)이란 상(商:은)나라 탕(湯)왕이 상나라를 세울때 지대한 공(功)을 한 재상(宰相)을지낸 개국공신 이윤을 말한다.
중국(中國)은 원래 ‘사이중(中)’에 ‘땅국(國)’자로 “가운데 사이의 땅”이란 뜻으로 지어준 이름이다. 아한단군이 유위자를 국태사(國太師)로 삼은때는 병진 30년인 BC1805년으로, 하(夏)나라가 몰락하고 상(은)나라가 시작될 무렵이다. 지나의 25사나 우리의 역사 어디에도 중국(中國)이라는 천자국(天子國)은 없다. 원래 “가운데 사이의 땅의 뜻인 중국(中國)”에있던 나라들은 ‘가운데 사이의땅’ 이 상징하듯이, 너무나 작은 소국(小國)들이였다. <맹자盟子>의 기록에, 은(상)땅은 70리였고, 주(周)나라 땅은 100리였다라고 기록되어있다. 또한 夏后殷周之盛 地未有過千里者也(하후은주지성 지미유과천리자야) “ 하의 뒤를이은 은나라 주나라때의 흥성할때의 땅(국토)은 천리를 넘지못했다.”라고 <맹자>에 기록되어있다. 옛날 지나의 나라들은 모두 황하(黃河)아래 하남성(河南省)에만 국한(局限)되어 있는 아주 작은 나라들이였다. 그래서 ‘가운데 사이의 땅’이란 뜻으로 중국(中國)인 것이다.
<통지通志: 정초>와 <자치통감資治通鑑: 사마광>의 기록을 보면, “중국(中國)의 조상은 사이(四夷)에서 생겼으며 사이는 고구려, 백제, 신라, 왜의 부족(部族) 일부에서 갈라져 나간 것이다.”라고 되어있다. 그들에게는 기분 나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엄격하게 따지면 중국(中國)은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의 지족(支族)인 것이다.

● ‘중국’은 1912년에 나온 신생어
지금 우리가 부르는 ‘국호國號’로서의 중국은 ‘중화민국’의 약칭(略稱)으로, 1911년 손문(孫文)이 호북성(湖北省) 무창(武昌)에서 3민주의(三民主義), 즉 민족, 민권, 민생을 부르짖으며 북경에 있던 청(淸)나라를 타도하자는 신해혁명 (辛亥革命)을 성공한 다음해인 1912년 1월 1일 이후부터이다.
1949년 10월1일 모택동이 ‘중화인민공화국’을 건설하여 지금의 ‘중공’이 된것이며, 손문의 ‘중화민국’의 약칭이 ‘중국’인 것이다. 말하자면 중국(中國)이란 정식국호는 1912년 1월 1일 이후부터 나온 신생어(新生語) 이다.
따라서 대만(臺灣)에있는 중화민국의 약칭이 ‘중국’이고, 지나본토에 있는 중화인민 공화국의 약칭은 ‘중공’인 것이다. 그러므로, 중화민국과 중화인민 공화국을 한꺼번에 부를때는 옛날부터 사용했던 ‘지나(支那)’가 가장 적합한 명칭이다. 또 한가지 중화인민공화국이나 중화민국의 약칭을 첫글자인 중(中)과 끝자인 국(國)을따서 ‘중국(中國)’으로 고집한다면, 우리는 한국(韓國)이라고 부르지말고 ‘대국(大國)’이라고 불러야한다. 대한민국의 첫글자인 ‘대(大)’자와 마지막 자인 ‘국(國)’자를 따서 ‘대국大國’이라 해야 옳단 말이다. 반드시 광활한 영토를 가지고 있어야만 대국이되는 것은 아니다. 민족정기(民族精氣)가 살아있고, 역사의식(歷史意識)이 있으면 족하다.

동이배달한민족(東夷倍達韓民族) 상고사는 9,700년

● 한민족사란 ?
단제 신채호 선생은 “ 역사란 아와 피아의 투쟁이 시간적으로 발전하고 공간적으로 확대되는 심적 활동상태의 기록이다.” 라고 했고, 웹스터(Webster) 사전에는 “ 역사란 과거에 일어난 모든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라고 정의 하고있다. 또한 한민족사를 지은 이중재 선생은 “역사(歷史)란 집을 짓고 살면서 벼농사를 많이 짓고 산 조상들의 삶과 지혜를 기록한 것이다.” 라고 했다. 따라서 같은 지역에 살고 같은 말을 하며 생활, 양식, 습관, 문화, 역사를 같이하는 인간
집단인 우리 한(韓)민족의 역사가 다름 아닌 한민족사(韓民族史)인 것이다.

● 한민족 상고사(上古史)는
상고사(上古史)는 환국(桓國: BC8936), 배달국(倍達國: BC3898), 단군조선 (壇君朝鮮: BC2333), 북부여(北扶餘: BC239), 동남부여(東南扶餘), 고구려(高句麗: BC213), 신라(新羅: BC57), 백제(百濟: BC213), 대진국(大震國: 발해, 668-957) 까지를 말한다. 약 9,700년 동안의 우리민족사를 동이배달한민족 상고사 (上古史)라 한다. 역사의 3대 요소를 사람(人), 장소(場所), 시간(時間)이라 한다. 고려때 까지도 아시아 전 대륙을 지배했으나, 백제가 망하고, 고구려가 망하고, 고려가 망하면서 조상들의 옛 고토(古土)를 빼앗기고 한반도(韓半島)로 쫒겨온 비참한 신세가 된 것이다. 역사적 인물과 시간은 정확히 알고있으나 조상들의 옛 영토를 빼앗겼기 때문에 장소 즉 당시의 강역(疆域)를 정확히 밝히는 것이 우리 민족사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지금까지 필자는 당시의 강역(疆域)을 찿아내는데 주력해오고 있다.

● 지명 조작과 역사서 분실
지나(支那: 중국의 옛 이름, China)인들은 지금도 끊임없이 옛 지명을 없애고, 지명을 옮기고, 지명을 다른 이름으로 바꾸고있다. 또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중공(中共)은 80년대 초에 3,700자의 한자(漢字)를 바꿔버려 우리가 알 수 없는 글자(간자체)가 되어버렸다. 춘추전국시대인 BC 770 - BC 233때에 노, 위, 정, 진(秦), 조, 채, 연, 송, 제, 진(晉), 초, 진(陳), 12개의 열국이 서로 패권 다툼을 한다. 진나라가 3개 있는데, 진(秦)은 섬서성에, 진(晉)은 하남성에, 그리고 진(陳)은 안휘성에 있었다. 진시황(BC259 – BC 210)이 BC221년에 지나대륙(支那大陸)을 통일하고나서 승상 이사의 말을듣고 세상의 모든 역사서를 불태우고 학자 460명을
땅속에 생매장시킨 사건이 있었다. 이것을 이름하여 “분서갱유焚書阬儒”라 한다. <한서지리지> ‘하71’에는, “번서갱유燔書阬儒”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불탄 사서가 모두 단군조선의 역사서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 진나라의 천하 통일은 겨우 황하(黃河) 이남
단군조선의 제후국에 불과한 진(秦)나라가 패(覇: 다른 제후국과 연합하여 또 다른 제후국을 정벌함)를 이용하여 당시의 7웅(七雄)인 연(燕), 한(韓), 조(趙), 위(魏), 제(齊), 초(楚)를 통일한 것은 아시아 대륙 전체가 아니고 단지 황하 아래 섬서성 (陝西省)과 하남성(河南省)에 있던 당시의 작은 제후국(100리의 땅)들을 통일한 것에 불과하다. 황하 북쪽에는 엄연히 단군조선(壇君朝鮮)의 정통성을 계승한 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 고구려등이 고스란히 존재하고 있었다. 진(秦)이 제후국들을 쉽게 통일 할 수 있었던 것은 진나라의 9대 목공(穆公)이 백리해 (百里奚)라는 신하를 기용한 때문이다. 백리해는 하(夏: 하남성 낙양)나라 사람으로 진나라(섬서성 함양)에 가서 재상이 된 사람이며 진(秦)이 당시의 제후국들을 통일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사람이다.

● 사마천의 <사기>로 다시 시작
강소성 패현 사람인 유방( BC 247 – BC195)이란 걸출한 사람이 한(漢)나라를 세우고 대대적인 역사서를 편찬하기에 이르렀을때, 지나(支那: China)의 역사서중 가장 으뜸이라고 하는 사기(史記)는 사마천(司馬遷: BC 145 – 86)이란 사람이 16년에 걸쳐쓴 역사서로 황제헌원(BC 2697)부터 서한 무제때까지 약 3,000년 간의 역사를 기술한 것으로 총 130권으로 되어있다. 이 사기(史記)를 쓸때 서경(書經)을 보고 지었다고 한다. <삼국지> ‘왕숙전’의 기록을 보면, 사마천이 <사기>에 경제(景帝: 제6대 왕)와 무제(武帝: 제7대 왕)의 잘 잘못을 기록했다가 무제가 노(怒)하여 효경본기 (孝景本記)와 무제본기(武帝本記)를 삭제하고 그 때문에 사마천은 부형(腐刑: 남자를 거세하는 형벌)에 처해졌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당시 사마천 (司馬遷)은 비교적으로 사실에 가까운 기록을 한 것으로 보인다.

● 서경인 환시래(西傾因 桓是來)
사마천의 <사기史記> ‘본문 제 2권’에 다음과 같은 글이있다. 西傾因桓是來 (서경인환시래) “ 서쪽이 기울어졌기 때문에 환(桓)이 왔다” 이다. ‘서쪽이 기울다’란 고산지대를 넘어 왔다는 뜻으로 보인다. 따라서 분명히 환(桓)이란 사람들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왔다는 뜻인 것이다. 당시는 경도(동경) 80도를 경계하여 서장성(西藏省) 남쪽에 곤륜산( 7282 m) 과 신강성(新疆省) 윗쪽에는 천산(승리봉 7439m)이 있는, 경도80도를 기준하여 서쪽은 요서(遼西)라 하고 동쪽은 요동(遼東)이라 한 것 같다. 감숙성 삼위산(三危山)에서 길림성과 함경북도에 위치한 태백산(太白山: 장백산, 불함산,묘향산,백두산)인 이곳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약 10만년 전부터 살았는데 그들 중에 한분이 BC 8936년에 신강성에 있는 천산(天山)에서 도(道)를 통한 사람으로 그를 가리켜 환인(桓因: 한인) 이라고도하고, 안파견(安巴堅)이라고도 한다.

● 한(桓), 한(韓), 한(漢)의 의미
자랑스런 우리 조상들은 배달국(倍達國) 때 만들어진 뜻 글자인 한자와 단군조선 때의 소리 글인 가명(이두어)를 함께 사용해 왔다. 환(桓)은 ‘굳셀환’, ‘클환’으로 “고산족”이란 뜻이고, 한(韓)은 ‘우물난간 한’, ‘나라이름 한’으로 “유목민”이란 뜻이며, 한(漢)은 ‘은하수한’, ‘물이름한’으로 “하천민”이란 의미이다. 따라서 우리 한(韓)민족은 고산족이면서 동북아시아에서 유목생활을 하고 농사를 짓고 사냥을 하던 민족이다. 이 안파견 혹은 환인은 고산족들 중의 장자(長子) 즉, 장손이였다. 안파견은 형제 9명으로 이들를 사서에서는 구환(九桓)이라고 한다. 이 장손을 백이(伯夷)라고도 하며, 이 백(伯)이란 글자의 의미는 ‘맏형’, ‘큰아버지’, ‘우두머리’이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우리 동이배달한민족은 장손으로 우두머리란 뜻 이다.

● 우리는 동이배달한민족(東夷倍達韓民族) 이다
여기서 이(夷)자는 하늘( 一)에서 내려온 활을 잘쏘는 (弓) 사람(人)이란 뜻이다. 이렇게 훌륭한 뜻을 지닌 이(夷)즉, 맏형이고, 우두머리인 백이(伯夷)들은광명(光明)을 숭배하는 민족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광명 즉 해를따라 계속 이동했기때문에 이 백이에게 동이(東夷)라는 명칭이 붙었다. 따라서 우리 한(韓)민족을 정의 하면, 고산족이면서 동북아시아에서 유목생활과 사냥을 하면서 농사를 짓고살던 장자 즉, 장손으로 광명(해)를 숭배한 민족으로 동쪽으로 계속 이동해온 하늘에서 내려온 활을 잘 다루는 지금으로부터 약 11,000년 부터 살고있던 민족이다. 때문에 한민족보다는 “동이배달한민족”이라 명명해야 옳다.

● 동이(東夷)가 인류의 뿌리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 이런 기록이있다.
東邦曰夷 夷者柢也(동방왈이 이자저야) “ 동방에있는 동이들이 인류의 뿌리다.”
言仁而好生(언인이호생) “ 말이 어질고 젊잖은 도덕군자다.”萬物柢地而出(만물저지이출) “ 만물이 땅밑에있는 뿌리에서 자라나듯이 동이들이 만인류의 철학사상의 뿌리다.” ( 본문해석은 율곤 이중재 선생 저서에서 인용함) 천(天), 지(地), 인(人) 삼원일체(三原一體)와 오행(목, 화, 토, 금, 수) 사상이 동이배달한민족(東夷倍達韓民族)의 우주철학사상(宇宙哲學思相) 이다. 우리 민족은 하늘에서 시작된 민족이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하늘의 자식이란 뜻에서 천자(天子)라 하고 천손족(天孫族)이라 한다. 지나(支那)의 채옹(蔡邕)이란 사람이 쓴 < 독단獨斷>이란 저서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있다. 天子夷狄之所稱 父天母地 故稱天子 (천자이적지소칭 부천모지 고칭천자) “ 천자는 이적(동이東夷)의 명칭으로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하여 태어났기 때문에 천자(天子)라 한다.” <신당서>와 <구당서>를 비롯한 수많은 지나(支那)의 사서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동이(東夷)라고 기록되어 있다.

● 한국(桓國: 환국)은 인류 최초의 나라
이들 동이배달한민족은 경도 80도 서쪽에 있는 인류의 발상지(發祥地)라고 하는 파미르고원( The Pamirs)을 떠나 동쪽으로 계속 이동하여 BC 8936년에 흑수(黑水)와 태백(太白)사이, 현 흑룡강성(黑龍江省) 하알빈 밑 완달산(옛날에는 파나류산임)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환국(桓國)을 세워 5,038년간 존속했다. 당시 환국의강역은 남북 5만리 동서 2만리로, 12연방국을 가지고 있었던 정통국으로 인류 최초의 국가로 보인다.

● 배달국과 단군조선
BC 3898년 음력 10월 3일에 환웅천황(桓雄天皇)이 배달국(倍達國)이라는 나라를 세워 1,565년간 실존했던 두번째 등장한 우리조상이 세운 나라다. 배달 (倍達)이란 도(道)를 통했다는 뜻이다. 어떤 사서(史書)에는 배달은 “ 밝다” “ 밝은”의 뜻이라고도 해석 한 학자들도 있다. 필자는 둘다 옳다고 생각한다. 무진년인 BC 2333년에 환검 (왕검)단군께서 아사달( 이두어로 새로운땅 혹은 새로운 산으로 산서성에 있는 말갈백산인 현 연경산을 뜻하거나 혹은 태원을 뜻함)에 도읍(都邑)을 정한후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하고 47대 단군들이2,096 년 동안 통치하던 나라이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에의해 고조선(古朝鮮)의 이름으로 신화(神話)라고 비하(卑下)했지만 단군조선은 실존했던 국가이다.

● 우리의 역사역년(歷史歷年)은 5,909년
2011년 현재를 기준하여 동이배달한민족사의 역사 역년(歷年)은 환기(桓紀: 환인 부터) 10,947년, 배달기(倍達紀: 환웅천황 부터) 5,909년, 치우기(蚩尤紀: 치우천황부터) 4,738년, 그리고 단기(壇紀: 단군왕검 부터)는 4,344년 이다. 따라서 우리 한민족(韓民族) 즉, 동이배달한민족사 (東夷倍達韓民族史)의 역사역년은 배달기(倍達紀)인 5,909년을 사용해야 옳다. 신시개천(神市開天; 나라를 다스리기위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뜻)이 BC3898년 음력 10월 3일이며, 환웅시대(桓雄時代)인 배달국(倍達國)의 역사기록이 여러 사서(史書)에 언급되어있는데 반하여 환국(桓國)에 대한 기록은 많지않아 더 연구해야 할 부분이기 때문이다. 또한 음력 10월 3일을 동이배달한민족의 설날로 지정하고 이날을 기념해야 한다. 유태인들은 한 해의 시작 (그들의 설)을 10월로 하고있다. 우리 동이배달한민족의 문화가 그들에게 전파된 것으로 보여진다.

Thursday, February 23, 2012

신라가 한반도(韓半島)에 있지 않았다는 이유. 제5부

● 열한번째: 신라와 말갈이 싸운 곳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제6대 지미이사금 14년(125) 봄 정월과 가을 7월에, 제7대 일성이사금 4년(137) 봄 2월과 6년(139) 8월에, 제10대 내해이사금 8년(203) 겨울 10월에, 제17대 내물이사금 40년(395) 가을 8월에, 제20대 자비마립간 11년(468) 봄에, 제21대 소지마립간 2년(480) 11월과 3년(481) 3월에, 약 356년 동안에 걸쳐 9차례 말갈(靺鞨)과 전쟁을 한 것으로 되어있다. 다음은
제7대 일성이사금 4년(137)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四年春二月 靺鞨入塞 燒長嶺五柵(사년춘이월 말갈입새 소장령오책) “ 4년 봄 2월에 말갈이 변방에 쳐들어와 장령에 있는 다섯개의 목책(木柵: 나무 말뚝을 박아 만든 울타리)를 불태웠다.” 여기에서 언급된 장령(長嶺)은 장령진(長嶺鎭)과 같은 장령(長嶺)으로 보이며, 시중에 나와있는 <삼국사기>에는 “장령진(長嶺鎭)은 경주 동쪽 25리에 있다.”라고 너무도 친절하게 해설을 해놓았는데, 경주 동쪽 25리가 당시 신라의 변방(邊方)이란 말과 같다. 그렇다면 신라(新羅)와 고구려(高句麗) 중간 지점인 경상북도나 강원도 부근에 말갈(靺鞨)이 살고있었다는 이야기가 성립되는 것이다. 원래 단군조선(壇君朝鮮)은 연방국(聯邦國)으로 단군조선 말기에 ‘조선족’에서 갈려나간 지파(支派)로 예(濊), 읍루(揖婁), 물길(勿吉), 말갈(靺鞨)로 부르다가 말갈에서 몽고족, 속말갈, 흑수말갈로 나누어 지며 흑수말갈에서 여진족(女眞族)으로 여진족에서 생여진(生女眞), 숙여진(熟女眞)이 생기고 생여진에서 만주족(滿州族)으로 이어지는 족속(族屬)을 말한다. 말갈(靺鞨)을 지금의 내외(內外) 몽고에 살고있던 몽고족 (蒙古族)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것으로 보인다. 식민사학이나 반도사학의 관점(觀點)에서 보면 한반도의 전라도와 충청도는 백제(百濟), 경상남북도는 신라(新羅), 그리고 백제와 신라 윗쪽은 고구려(高句麗)의 영토인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한반도에 있던 신라(新羅)가 말갈(靺鞨)과 356년 동안에 걸쳐 9번이나 전쟁을 했다는것은 이해가 되지않는 부분이다. 물론 식민반도사학 (植民半島史學)의 원조(元祖)이자 바이벌(Bible: 권위있는 서적)이라고 불리우는 <조선사> 37권 어디에도 한반도의 고구려, 백제, 신라 사이에 말갈(靺鞨)이 살고있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신라(新羅)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 열두번째: 당(唐)나라와 싸운 석성(石城)은?
“신라 제 30대 문무왕(文武王) 11년(671) 6월에 왕(문무왕)은 장군 죽지(竹旨) 등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백제 가림성(加林城)의 벼(식물: Oryza sativa)를 밟아버리게 했으며 마침내 당(唐)나라 군사와 석성(石城)에서 싸워 적군(당나라군) 5천 3백 명의 목을 베고 백제장군 2명과 당(唐)나라의 과의(果毅: 군사의 장교급 정도를 뜻한것으로 보임) 여섯명을 사로잡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이다. 당나라의 도성(都城)인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에서 백제땅 충청도 부여까지는 직선 거리 약 3,744리 이다. 한반도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식민반도사학 (植民半島史學)의 이론대로라면 한반도 경상도에 있던 신라와 싸우기 위해 당나라는 3,744리의 머나먼 길을 군사와 말을 배에 싣고 황해를 건너와서 전쟁을 했다는 이야기인데… 전설 같은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 전쟁에서 사대주의자(事大主義)들에게는 쉽게 이해가되지않을 당(唐)나라 군사 5천 3백명을 참수(斬首: 목을 벰)했다는 엄청난 기록이다. 당(唐)나라의 참패 (慘敗)인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석성(石城 )은 강서성(江西省)과 복건성(福建省) 사이에 있는 지명이다. 원래 백제(百濟)의 영토였으나 660년 나당(羅唐) 연합군에게 백제가 망한후 신라의 영토가 된곳으로 당(唐)나라는 신라를 배신(背信)하고 신라마저 정복(征服)하려고 백제의 부흥군(復興軍)을 도와 신라(新羅)에 도전(挑戰)하므로 발생한 전쟁으로 보인다. 신라는 한반도에 있지않았다.

● 열세번째: 복건성에는 아직도 신라의 흔적이
<삼국사기> ‘제21대 소지마립간’의 기록에, 秋七月 置臨海長領二鎭 以備倭賊 (추7월 치임해장령2진 이비왜적) “가을 7월에 임해와 장령에 2진을 설치해서 왜적(倭賊: 일본의 전신으로 당시 복건성의 맞은편인 대만에 있을 때임)에 대비 했다.” 당시 신라의 핵심 영토는 강소성, 안휘성, 호북성, 절강성, 복건성이다. 복건성(福建省)에는 신라구(新羅區)란 지명이 있었고, 2009년 현재의 복건성 자체
지도에도 신사(新祠), 신우(新圩), 신현(新縣), 신천(新泉), 라암(羅岩), 라원(羅源), 라교(羅橋), 라방(羅坊)등 신라의 신(新)자, 라(羅)자와 관련된 지명들이 많다. <태백일사> ‘고구려본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고구려 보장 12년(646)에 신라의 백성을 천주(泉州: 복건성에 있으며 왜倭가 있던 대만과 마주보는 곳으로 경도 118.525도 위도 25도에 위치함)에 옮기고 이로서 알맹이로 삼았다. 이 해(年)에 백제가 조공을 하지않아 병력을 파견하여 요서의 진평군을 취하고 백제군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복건성과 인접하는 절강성(浙江省) 임해(臨海: 김수로왕의 가락국이 있던 김해金海)에는 신라산(新羅山)이 있다고 <중국고지도>와 <대청일 통지>에 기록하고 있다. 신라가 망하고 1,070여년이
지난 지금도 지나대륙(支那大陸)에 신라와 관련된 지명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당시 이곳이 신라의 영토였음을 입증하는 것이며 신라(新羅)는 한반도(韓半島)에 있지 않았다는 증거다.

● 열네번째: 한반도의 현 지명들은 신라가 망한후 생긴 지명들이다.
<삼국사기> ‘잡지 제6 지리 4’에 의하면, “삼국시대(고구려, 백제, 신라)의 지명(地名)만 있고 위치는 자세히 알 수 없는 땅들” 358곳 중에 우리 한국사람들의 귀에 너무나도 익숙한 지명들로 해주(海洲), 강릉(江陵), 하동(河東), 부평(副平), 강남(江南), 해남(海南), 용산(龍山), 대구(大丘), 부산(釜山), 마포(馬浦)등의 지명이 기록되어 있다. 필자는 한국내의 지명들을 잘 알지못하기 때문에 더 많은 이름을 발췌하지 못하고 필자의 생각으로 한반도의 지명들이라고 믿어지는 지명들만 10개를 나열한 것이다. 만약 한반도 경상남북도에 신라가 있었다면 신라의 영토안에 있었던 대구와 부산(釜山)의 위치를 자세히 알 수 없다고 한다면,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기 그지없다. 삼국사기는 고려 17대 인종(仁宗) 23년(1145)에 김부식 어른이 쓴 것이다. 고려 인종은1141년에서 1165년 까지 24년간 황제 (皇帝)로 있었던 분이다. 신라가 935년에 망하고 210년 후에 <삼국사기>가 지어졌다. 신라가 망하고 약 1,070년이 지난 지금도 지나대륙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당시의 지명들이 혹은 지명들의 흔적이 있는데, 신라가 망한지 불과 210년 후에 당시 신라의 영토라고 믿고있는 한반도 경상남북도 안에있는 지명의 위치를 알 수 없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한마디로 신라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크게 웅변(雄辯)하는 것이 된다.

● 열다섯번째: 경주(慶州)는 경상북도에 있지도 않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56대 경순왕 9년(935)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11월에 왕은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서울을 떠나 태조(太祖: 고려 왕건)에게 귀순했다. 꽃다운 수레와 훌륭한 말이 30여리에 뻗쳐 길은 사람으로 메워졌으며 구경꾼들이 쭉 둘러서 있었다. 태조는 교외에 나가서 영접해 위로하고 대궐 동쪽에 가서 좋은 집 한구(區: 구역)를 주고 맏딸 낙랑공주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다. 12월에 왕(경순왕)을 봉하여 정승공(正承公)을 삼으니 그 지위는 태자의 위에 있었다. 봉록 1천석을 주고 시종한 관원과 장수들을 모두 채용해 주었으며 신라를 고쳐 경주(慶州)라 하여 공(公)의 식읍으로 삼았다.” 또한 <삼국사기> ‘잡지 제3 지리 1’에는, 末王金傅 以國歸我太祖 以其國爲慶州(말왕김부 이국귀아태조 이기국위경주) “마지막 왕 김부(경순왕의 이름)는 나라를 가지고 우리 태조(고려 왕건)에게 귀순하매 그 나라(신라)를 경주라 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 까지도 우리는 한반도 경주가 신라의 1,000년 동안의 도읍지(都邑地)로 배웠고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보는바와 같이 경주(慶州)는 신라가 망하고 난 후에 고려(高麗)를 세운 왕건(王建)이 만들어 준 이름인 것이다. 원(元)나라 때 탈탈이 지은 <요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開州 鎭國軍 節度 本貊地 高麗爲慶州 渤海爲東京龍原府 有宮展 都督慶 鹽 穆 賀四州事 (개주 진국군 절도 본맥지 고려위 경주 발해위동경용원부 유궁전 도독경 염 목 하사주사) “개주는 진국군이고 절도사를 두었다. 본래는 맥(고구려를 뜻함)의 땅이였으며 고려가 경주라 했다. 발해(대진)의 동경 용원부이며 궁전이 있다. 도독을 경주 염주 목주 하주 4곳에 두었다.” <요사>에서도 <삼국사기>처럼 고려가 경주라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발해(대진)의 동경 용원부라고 했다. 대조영이 세운 대진(大震: 발해)은 5경(다섯 곳의 수도)이 있었는데 동경 용원부가 바로 요녕성(遼寧省) 지금의 요양(遼陽)이였다. 2009년 대륙 지도에는 요양 동남쪽에 동경릉(東京陵)의 지명도 있다. 대진(大震)의 황제묘나 신라 경순왕의 묘인지 누가 알겠는가? 이렇게 경주는 요녕성에 있었다.

신라가 한반도(韓半島)에 있지 않았다는 이유. 제4부

● 여섯째: 운주(運州)는 한반도가 아니다.
“신라 56대 경순왕 8년(934) 가을 9월에 운주(運州)지경(地境)의 30여 군(郡), 현(縣)이 태조(太祖: 고려 왕건)에게 항복했다.”라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운주(運州)는 현 산서성(山西城) 황하강(黃河江)이 꺾이는 지점에 있는 영제현(永濟縣) 동북으로 현 대륙지도상에 운성시(運城市)이다. 이 운성시(運城市) 서남 쪽이 바로 그 유명한 탁록(涿鹿: 산서성 서쪽 최남부 운성염지運城鹽池가 2009년 현재 해지解池로 이름이 바뀌고 그 일대인 당시의 탁록은 지금은 해주解州라 부름)으로 치우천황과 황제헌원이 10년간 싸운 곳이다. 시중에 나와있는 <삼국사기>에는 운주(運州)를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洪城)’이라고 친절하게 주해를 달아 놓았다. 말하자면 이곳 홍성 근처에서 치우(蚩尤)와 지나인 (支那人)들이 자신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헌원(軒轅)이 BC2707부터 BC2697까지 10년간 73회를 싸웠다는 말과 같다. 이웃집 닭이 웃을 일이다. 이것 또한 일본인들과 식민사학(植民史學)의 역사 날조(捏造)인 것이다. 신라는 한반도에 있지않았다.

● 일곱째: 임나(任那)는 절강성에 있다.
한반도 김해에 6개의 가락국(駕洛國)중 금관가락국이 제일 큰데 이 금관가락국이 있었던 곳인 임나(任那)에 야마토(大化) 일본이 궁가(宮家: 미야께)라는 통치기관 을 설치해 놓고 백제, 신라를 속국으로 만들었다는 “임나 일본부설”로 일본인들은 한반도 남쪽 가야국이 있었던 곳에 임나가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한반도(韓半島)남쪽에는 가야국(伽倻國)도 신라(新羅)도 없었다. 당시 김 수로왕의 가락국(駕洛國: 가야국伽耶國)은 절강성(浙江省)에 있었다. 임나는 무지절독 (武持節督)으로 ‘무사나 무인들이 뭉쳐서 이루어진 군사기지 같은것’이다. 임나(任那)는 지나대륙 (支那大陸) 절강성(浙江省) 임해(臨海: 김해金海)가 있는곳에 있었으며 백제(百濟)의 속국으로 백제가 망(亡)하면서 임나(任那)도 망한다. 이들의 주장은 거짓으로 임나는 한반도에 있지도 않았다.

● 여덟번째: 경주에는 왕들의 묘와 묘비가 없다.
한반도 경상도에 1,000년 사직(社稷: 나라)의 신라(新羅)가 있었다면 신라왕들의 묘(墓)가 모두 경상남북도에 있어야 한다. 다시말하면 한반도 경상남도 경주(慶州)에 1,000년동안 도읍지(都邑地)였던 왕궁터, 56명의 신라왕들의 묘(墓), 왕들의 묘비(墓碑)가 있어야 한다.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고낭포리에 신라(新羅)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의 릉(陵)이 있고 비각(碑閣)이 있다고 말할 분들도 있으리라 본다. 그러나 그 묘(墓)는 진짜묘가 아니고 비(碑)가있다면 그 비석 (碑石)은 이씨조선때 세운 비(碑)가 분명하다. 의심스러우면 Carbon-14 (탄소 년대 측정 법) 방법으로 한반도(韓半島)에있는 모든 묘지와 비석을 년대측정(年代測定)하면 간단히 풀리게 될 문제라 본다. 한반도 경상남도는 말할 것도 없고 한반도 (韓半島) 어느곳에도 신라왕의 묘지(墓地)가 있다고 기록된 사서(史書)는 없다. 천년 사직(社稷: 나라)인 한반도 경주에 왕궁터도, 황제(皇帝: 당나라 고종이 신라 29대 무열왕 김춘추를 ‘태종황제’ 라했다)들의 묘도, 묘비도 없다는 것은 무엇을 시사(示唆)하는가! 촌부(村婦: 시골 여자)가 죽어도 묘비를 쓰는데 하물며 천자국(天子國)인 대신라국(大新羅國) 왕들의 묘(墓)와 묘비(墓碑)가 없다니….. 신라는 한반도에 있지않았기 때문이다.

● 아홉번째: 계백장군이 싸운 황산(黃山)은 연산 벌판이 아니다.
<삼국사기> 제2권 백제6, 의자왕20년(660) 5월의기록을 보면, “ 당(唐)나라와 신라 군사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말을 듣고 왕(의자왕)은 계백(階伯) 장군을 보내어 결사대 5천명을 거느리고 황산(黃山)에 나아가 신라(新羅) 군사와 싸우게했다. 4번 싸워 4번 다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서 마침내 패전하여 계백이 전사했다. 이때 계백(階伯)장군이 마지막으로 싸운 황산(黃山)은 한반도 충청남도 연산 벌판이 아니고 지나(支那)대륙인 것이다. 안휘성(安徽省), 절강성 (浙江省) 강서성(江西省)이 서로만나는 곳에 황산(黃山)이 있고 당시 백제(百濟)의 사비성(泗沘城)은 황산 바로 윗쪽 현 대륙지도에 양자강(揚子江) 바로밑 청양(靑陽) 이라는 곳이다. 현 대륙지도(大陸地圖)에는 황산(黃山: 경도 118.276도 위도 29.926도의 위치)이라고 글자 한자 틀리지않고 그대로 남아있다. 신라는 대륙에 있었다.

● 열번째: 이하(泥河)와 당항성(黨項城)은 한반도에 없다.
“20대 자비마립간 11년 (AD468) 봄에 고구려와 말갈(靺鞨)이 북쪽 변경의 실직성(悉直城)을 습격했다. 가을 9월에 15세 이상된 하슬라(何瑟羅) 사람을 징발하여 성(城)을 이하(泥河)에 쌓았다.”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이하(泥河)는 하남성(河南省)과 안휘성(安徽省) 사이로 하남성에 있는 강(江)인데 이하(泥河)바로위에 항성(項城)이 있어 이 항성이 이때 쌓은 성(城)으로 보인다. 그 유명한 당항성(黨項城)이 바로 이 항성(項城)을 일컫는 것이다. 이 당항성은 신라가 당시 섬서성(陝西省) 서안 (西安)에 있는 당(唐) 나라로 들어가는 관문(關門)으로 27대 선덕왕 11년(642)에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의 연합군에게 이 당항성(黨項城)을빼앗김으로써 김 춘추가 이민족(異民族)인 당(唐)나라 고종 이치(李治)에게 “ 당(唐)나라로 들어오는 당항성을 고구려와 백제에게 빼앗겨 더 이상 당나라에 들어올 수 없으니 신라와 당이 연합하여 이들 백제와 고구려를 말망시키자는” 동이배달한민족(東夷倍達韓民族)의 민족상잔(民族相殘)의 비극의 불씨가 바로 이 이하(泥河)에 있던 당항성(黨項城) 때문으로 보여진다. 현 대륙지도 하남성(河南省)에 항성(項城)과 이하(泥河)가 글씨 하나 틀리지않고 그대로 남아있다.
한반도 어느곳에 이하(泥河)란 하천과 항성(項城)이란 지명이 있는지? 식민반도사학(植民半島史學)에게 정중히 묻는 바이다.

신라가 한반도(韓半島)에 있지않았다는 이유. 제3부

● 첫째: 신라의 금성(金城)을 포함한 모든 도읍지는 한반도에 없었다.
신라는 992년 동안 도읍지를 최소한 10번 이상 옮긴 것으로 보인다. 신라 최초의 도읍지인 금성(金城)은 감숙성(甘肅省) 난주(蘭州)이다. 이 곳이 바로 비단길(Silk road)을 연 곳으로 난주는 경도 103.545도와 위도 36.343도에 위치한 곳이다. 신라 김씨의 시조로 알려진 김일제(金日磾: 김알지의 중시조)는 흉노 조정(朝廷)에서 왕을 하던 휴도왕(休屠王)의 아들로 전한(前漢: BC202-AD8, 섬서성 서안)에서 벼슬을 하던 사람이다. 수,당나라 때 부르던 흉노족(匈奴族)은 당시 감숙성과 섬서성(陝西省) 북부에 살고 있어 흉노 조정, 김일제, 신라 금성은 서로 관련이 있어 보인다. 두번째의 금성은 산서성 현 임분시(臨汾市)로 한(漢)나라의 왕망(王莽: BC45-AD23)이 전한(前漢)을 멸하고 신(新)나라를 세울 무렵 감숙성 난주에 있던 신라는 난리를 피해 요동(遼東: 경도 110도의 황하 동쪽)인 산서성(山西省) 임분(臨汾)으로 옮겨 제2의 금성을 세운다. 임분은 단군조선을 세운 왕검 단군의 도읍지(都邑地)인 평양성(平壤城)이 있던 곳으로 이곳이 진한(辰韓: 진조선)에 속한 곳이다. 그후 신라는 영토를 넓혀 산서성 남부 패수현의 원곡 일대의 낙랑땅 까지 차지하였으나 고구려에 임분의 금성(金城)을 빼앗기고 2대 남해차차웅 20년(AD23)과 3대 유리 이사금 사이에 지나(支那)의 동쪽인 강소성(江蘇省) 서북 연수현으로 도읍을 옮기며 금성도 함께 옮긴 것으로 보인다. 그후 월성(月城)과 명활성 (明活城)에 도읍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문무왕 20년(680)에 가락국이 있던 김해(절강성 현 임해)를 소경(小京: 작은 서울)으로 삼았으며 그후 35대 경덕왕(景德王) 16년(757)에는 전주, 양주, 웅주, 한주, 삭주 5곳에 도읍지(都邑地) 를 두었다. 이들 도읍지는 모두 한반도가 아닌 지나대륙(支那大陸)에 있었다. 이런 주장은 <삼국사기>, <중국고금지명대사전>, <대당고김씨부인묘명>, <수서>, <구당서>, <신당서>, <북사>등에 근거한 것이다.

● 둘째: 낙랑(樂浪)은 산서성에 있다.
사서(史書)들의 기록에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의 활동 무대가
한반도가 아닌 지나 대륙인 것으로 <삼국사기: 김 부식>, <삼국유사: 김 견명>, <후한서: 범엽>, <구당서: 유후>, <신당서: 송기, 구양수>, <목천자전: 유효표>, <자치통감: 사마광>등에 기록되어 있다. 한가지 예로 <구당서>에, 新羅國 本弁韓苗裔也 其國在漢時 樂浪之也 東及南方 俱限大海 西接百濟 北隣高麗 東西千里 南北二千里 (신라국 본변한묘예야 기국재한시 낙랑지야 동급남방 구한대해 서접백제 북린고려 동서천리 남북이천리) “ 신라국은 본래 변한의 후예다. 그 나라는 한(漢)나라가 있을때 낙랑(樂浪: 하남성 낙양洛陽 북부를 포함하여 산서성 남,동부 패수浿水가 흐르는 패수현의 원곡일대) 땅에 있었다. 동쪽과 남쪽은 모두 큰 바다에서 끝나고 서쪽으로는 백제와 접하고 북으로는 고려(고구려)가있다. 동서로는 1천리이고 남북으로는 2천리 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반도(韓半島)는 동서가 672리 남북이 2,400리 정도이고, 우리가 배운대로 경상남북도가 신라(新羅)이고 전라남북도와 충청도가 백제(百濟)라면 경상도에서 전라도까지 동서(東西)가 어찌 1천리가 되며 경상북도 윗쪽은고구려(高句麗) 인데 남북(南北) 2천리란 말인가! 이런 엉터리를 민족사(民族史)라고 가르치고 배우고 있으니 가슴아픈 일이다. 신라는 한반도에 있지않았다.

● 세째: 신라 왕들의 묘는 대륙에 있다.
신라왕(新羅王)들의 묘(墓)가 대륙(大陸)에 있다. 1대 혁거세거서간 묘, 2대 남해차차웅 묘, 3대 유리이사금 묘, 5대 파사이사금 묘가 강소성(江蘇省) 사릉(원) (蛇陵園)에있고, 9대 벌휴이사금 묘가 강소성 연수현(連水縣)에있고 7대 선덕왕 묘, 31대 신문왕 묘가 강소성 낭산(狼山)에있고 34대 효성왕 묘가 강소성 법류사 (法流寺)에 35대 경덕왕 묘가 강소성 모지사(毛祗寺)에55대 경애왕 묘가 강소성 남산(南山)에있다. 25대 진지왕 묘는 사천성 영경사(永敬寺)에 29대 태종무열 왕 묘는 사천성 영경사 (永敬寺)에 38대 원성왕 묘는 사천성 봉덕사(奉德寺)에있다. 13대 미추이사금 묘가 하남성 임형현 대릉(大陵)에있고 41대 헌덕왕 묘는 산동성 천림(泉林)에 있으며 51대 진성여왕 묘는 안휘성 황산(黃山: 백제의 계백장군이 신라와 마지막 싸운곳) 에 있다. 49대 헌강왕 묘와 50대 정강왕 묘는 호북성 보제사(菩提寺)에 있다. 신라는 56명의 왕들중 18분의 묘(墓)가 지나대륙에 있는것으로 기록되어있다. 30대 문무왕 묘는 동해 큰바위 위이고 37대 선덕왕 묘는 동해에 화장했으니 모두 20분의 묘지가 밝혀진 셈이다. 상해(上海)가 있는 강소성(江蘇省)에 10분의 묘, 사천성(四川省)에 3분, 하남성(河南省)에 1분,
산동성(山東省)에 1분, 안휘성(安徽省)에 1분, 그리고 호북성(湖北省)에 2분의 묘가있다. 신라(新羅) 제 1대 혁거세거서간 (赫居世居西干)의 장지(葬地)에 관한 <삼국사기> 의 기록을보면, 在曇巖寺北 (재담암사북) “담암사 북쪽에있다.”라고 되어있다. 그런데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에는, 在曰雲岩寺南四里 (재왈운암사 남사리) “ 이르기를 운암사 남쪽 4리에있다.”로 <삼국사기>의 기록과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이 서로 다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재왈운암사남사리 (在曰雲岩寺南四里)”에서 ‘가로왈(曰) 자를 ‘구름운(雲) 자 위에 붙여서 ‘구름낄 담(曇)’자로 조작했고, ‘남사리(南四里)’를 ‘북(北)’으로 날조 (捏造)해 놓았다. 일본X들이 우리 역사서인 <삼국사기>를 조작, 날조한 또 하나의 실례인 것이다. 그들이 조작한 ‘담암사曇岩寺’는 어디에도 없고 강소성 상해근처에 있는 호구산(虎丘山)에 사릉(蛇陵)이 있고 그곳에 ‘운암사雲岩寺’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인들이 <삼국사기>는 조작을 했는데 <세종실록지리지>는 미처 변조하지 못한 탓인 것이다.

● 네째: 수두교 유행은 지나대륙이다.
단군조선(壇君朝鮮)때의 국교인 ‘수두교(일명 삼신오제교)’가 있다. 단군조선과 동시대(同時代)인 요(堯), 순(舜), 하(夏), 은(殷: 상), 주(周)나라 때까지 지나대륙(支那大陸)에 ‘수두교’의 일반 신앙이 널리 유행한다. 하(夏)나라를 세운 우(禹)가 홍수를 다스리기위해 8년동안 수고했으나 실패하여 남악형산(南嶽衡山: 호남성 형양시 남악구에 있는 산으로 해발 1,300.2m)에서 백마(白馬)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니 꿈에 현이(玄夷: 북쪽에 사는 동이로 산서성에 있던 단군조선을 뜻함)의 창수사자(蒼水使者: 왕검의 아들 부루)가 나타나 말하기를, 구산(九山: 구산은 없고 구산진이 산동성에 있음)의 동남쪽의 도산(塗山: 안휘성 숙주로 비정)에 신서(神書)가 있으니 석달동안 재계(齋戒: 마음과 몸을 깨끗이 하고 부정한 일을 멀리 하는 일)하고 신서를 꺼내보라 하여 우(禹)가 그대로 하고 금간옥첩 (金簡玉牒)의 신서를 얻어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을 배워 홍수를 다스리고 주신(州愼: 단군조선)의 덕을 고맙게 생각하여 정전(井田: 농지 개혁)를 제정하고 율도량형(律度量衡: 길이, 용적, 무게등의 단위 법)의 제도를 만들었다는 <오월춘추>의 기록으로 보아, 단군조선과 관련이 깊은 안휘성, 호남성과 인접한 지역인 강소성,호북성, 절강성에 ‘수두교’가 유행했으며 동황태일(東皇太一) 즉, 단군왕검께 제사(祭祀) 지내는 풍속이 가장 유행한 곳이 바로 호북성(湖北省), 절강성(浙江省), 강소성 (江蘇省)으로 단군조선의 유민(流民)들이 세운 신라(新羅)가 바로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 땅이라고 믿고있는 한반도 경상남북도에‘수두교’가 유행했다는 기록은 없다.


● 다섯째: 66번의 일식으로 본 신라의 강역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를 지은 서울대학교 박 창범 교수에 의하면, <삼국사기>에 기록된 신라(新羅)의 일식(日蝕)이 총 66개로 그중에서 53개가 사실로 입증 (立證)되어 80%의 실현률(實現率)을 보인다고 한다. 신라의 일식 기록은 서기 201년전과 서기 787년이후로 양분되는데 서기 201년 이전의 신라의 일식 최적 관측지는 양자강(揚子江) 유역이며 서기 787년 이후의 최적 관측지는 한반도 (韓半島) 남부라 한다. 신라(新羅)의 주된 강역(疆域)은 대륙의 강소성(江蘇省), 안휘성 (安徽省), 호북성(湖北省), 절강성(浙江省)으로 이곳이 바로 양자강(揚子江: 장강) 유역이며 당시 신라의 영토(領土)를 천문학 (天文學)이란 과학적인 방법으로 증명(證明)시킨 한 예(例)라 할 수 있다. 고구려의 영토였던 한반도는 고구려가 망한후 신라 35대 경덕왕 때부터 신라 영토의 일부가 된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한반도에 있지않았다.